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서울가정법원·서울행정법원 청사./전기병 기자

음식 배달 중 신호 위반으로 사망한 배달 기사가 업무상 재해를 당한 것이라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단순 부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신속하게 배달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인 만큼, 산업재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재판장 이정희)는 최근 A씨의 유가족이 “유족 급여와 장례비를 지급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단했다고 23일 밝혔다.

2023년 9월 한 음식 배달 업체에서 근무하던 A씨는 배달할 음식을 가지러 가기 위해 교차로에서 오토바이로 주행 중이었다. 좌회전 신호로 바뀌었지만 A씨는 이를 무시한 채 직진했고, 결국 맞은편에서 좌회전하던 차량과 충돌했다. 사고 직후 A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비장파열로 인한 저혈량성 쇼크로 이틀 후 사망했다.

A씨의 유족들은 A씨가 재해를 당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례비를 청구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이 이같은 비용 지급을 거부하자 유가족들은 소송을 냈다.

이 사건의 쟁점은 A씨의 사망이 범죄행위(신호위반)에 의한 것인지 여부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2항은 ‘근로자의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돼 발생한 사망’의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신호위반이라는 망인의 일방적 중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며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재판부는 A씨 유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A씨가 신호를 어겨서 사고가 난 것은 맞지만, 배달 업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사고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배달 업무 특성상 고객의 불만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속하게 음식을 배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며 “이 사건 사고가 A씨의 신호위반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사고인 점은 인정되나, 이는 업무수행을 위한 운전 과정에서 통상 수반되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사고 당일에만 배달 업무 32번을 수행한 점 등을 이유로 A씨가 판단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신호위반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A씨의 사업주와 동료 배달기사들이 배달 업무가 급박하게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진정서 등을 제출한 점도 고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