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스크루지의 감정을 ‘깃털처럼 가벼운’이라고 비유했네요. 이 소설을 관통하는 ‘고통’이란 주제를 더 잘 드러낼 다른 비유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지난 23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대 에듀테크 박람회 ‘벳쇼(Bett Show)’. 한 전시 부스에서는 영국의 인공지능(AI) 문학 교육 프로그램 ‘올렉스AI(Olex.AI)’가 내놓은 이 같은 조언이 모니터에 나타나고 있었다. 한 학생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구두쇠 스크루지)’을 읽고 쓴 에세이를 AI가 즉석에서 분석하고 ‘첨삭’해 준 것이다. 산업화 시대 가난 때문에 겪은 고통으로 돈에 집착하게 된 스크루지의 배경을 토대로 다른 비유를 찾아보란 뜻이다. 그러면서 AI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등장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분석해 글을 보완해 보아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날 올렉스AI는 학생 30명의 문학 에세이를 단 2분 만에 첨삭해 주는 능력을 보였다. A4 용지에 작성한 수기(手記) 에세이를 휴대전화로 촬영해 이 프로그램에 업로드하기만 하면 곧바로 1000자 분량 첨삭을 내놓는 식이다. 부스에 모인 교사들은 “소설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분석해 표현까지 첨삭하는 AI는 처음 봤다”고 했다. 2014년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해 영국 문학 교육과정 내용과 학생들의 에세이를 AI에 무한 반복 학습시킨 결과다. 현재 2000명 넘는 영국 문학 교사가 활용 중인 이 프로그램은 박람회에서 ‘교육·평가를 위한 AI’ 부문 등 2관왕을 차지했다.
지난달 22~24일 열린 벳쇼 박람회는 AI가 가져올 교육의 미래상을 미리 경험하기 위한 전 세계 교사와 학생들로 붐볐다. 1985년부터 개최된 ‘벳쇼’는 ‘교육계 CES’라 불린다. 올해 600개 넘는 에듀테크 기업과 130여 국에서 교사 등 3만명이 넘는 교육계 관계자가 참석했다. 현장은 마치 AI 기술 박람회를 방불케 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프레시던스리서치에 따르면, 작년 51억8000만달러(약 7조5000억원)인 AI 교육 시장은 2034년 1123억달러(약 163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기업부터 전 세계 수많은 스타트업이 ‘선점 효과’를 노리고 교육용 AI를 쏟아내는 상황이다.
챗GPT를 만든 오픈AI에 130억달러를 쏟아부으며 최대 투자자가 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이번 벳쇼에서 AI를 이용해 강의 자료를 수초 내에 만들어내는 ‘AI 스파크(AI spark)’를 최초 공개했다. 시연자는 이 프로그램에 ‘광학(光學)’을 주제로 한 전공 자료를 업로드하고 ‘광학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강의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AI는 ‘반사의 법칙’ 등 개념 설명과 현실에서 이 법칙이 적용된 사례를 찾아 사진과 함께 PPT 형식 자료를 깔끔하게 만들어 냈다. MS 관계자는 “수일이 걸릴 강의 자료 작업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 말 출시 예정인 이 AI는 미 항공우주국(NASA) 등 검증된 기관 자료를 기반으로 해 신뢰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200만명 넘는 학생이 쓰는 미국 에듀테크 기업 파워스쿨의 AI 교육 플랫폼 ‘파워버디(Power buddy)’는 학생 진로 설계까지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학생의 성적과 적성을 분석해 이에 맞는 대학, 전공, 직업 등을 AI가 분석해 알려준다. 예컨대 화학 과목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는 화학공학·에너지·화장품 업체 직원이나 약사, 반도체 연구원 등이 될 수 있는 진로를 설계해 제시한다. 이 업체 관계자는 “대학마다 제각각이라 전문 상담사도 알기 어려운 미국의 복잡한 장학금 데이터를 분석해 학생 성적과 거주 배경에 따라 취득 가능한 장학금까지 찾아준다”며 “고용 시장 데이터도 분석해 학생들에게 원하는 직업의 취업률, 미래 기대 수익 등 변화까지 제시한다”고 했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AI가 수시로 학생과 대화하며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높이고, 학습을 보다 쉽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기술들도 선보였다. 학습용 게임 플랫폼 ‘카훗’은 AI를 이용한 게임 자동 생성 기능을 공개했다. 이 AI에 위키피디아에 있는 ‘태권도’ 페이지 링크를 주니, ‘태권도 창시자는?’ ‘태권도의 핵심 정신은?’ 등 내용이 담긴 퀴즈 게임을 만들어냈다. 한국 스타트업 비주얼 캠프는 ‘리드포스쿨’이라는 AI 문해력 프로그램을 전시했다. 태블릿PC 등에 있는 카메라를 통해 AI가 학생의 시선을 추적, 문장 해독 능력을 측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이해하지 못한 문장·단어를 찾아 AI가 이에 대한 맞춤형 문제를 내며 학생들의 부족한 문해력을 보완한다.
행사 참석자들 사이에선 “’보조 교사’ 외에도 AI가 교육에 쓰이는 역할은 무궁무진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포토샵’으로 유명한 미국 어도비는 이번 벳쇼에서 이미지 생성형 AI를 이용한 ‘어도비 포 에듀케이션’을 선보였다. 학생들이 동화나 소설을 지으면 이를 분석해 그 내용에 걸맞은 이미지를 AI가 만든다. 학생들이 손쉽게 그림책이나 소설책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벳쇼(Bett Show)
영국교육기자재협회(BESA) 주최로 1985년부터 시작한 세계 최대 에듀테크 박람회. 매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에 빗대 ‘교육계의 CES’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