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보인고 3학년 360명 중 130명은 매주 토요일마다 학교에 나온다. 이 학교는 주말에 국어·수학 자체 모의고사를 실시하는데, 강제가 아님에도 학생 3분의 1가량이 스스로 학교를 찾는 것이다. 이 모의고사는 수능과 ‘판박이’다. 교사들이 기출 문제를 참고해 수능 문항 수와 동일하게 시험지를 준비하고, 시험 시간은 물론 종소리까지 실제 수능과 똑같다. 오양욱 보인고 교감은 “한국 양궁 국가대표가 올림픽을 앞두고 훈련장을 실제 대회장이랑 똑같이 마련하고 현지어 안내 방송을 트는 것처럼, 우리도 매주 실전 같은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 학부모 사이에서 “수능을 볼 때 덜 긴장할 것 같다” “주말 학원비도 아껴 좋다” 등의 호평이 쏟아졌다. 첫해엔 20명 규모로 시작했는데, 작년 100명, 올해 130명 규모로 불어났다.
상업고에서 출발한 보인고(자율형사립고)는 교육계에서 신흥 명문고로 주목받는 학교다. 서울대 합격자 수가 2021학년도 9명에서 21명(2022), 23명(2023), 33명(2024)으로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 2025학년도엔 38명의 서울대 합격자를 배출했다. 외대부고(56명), 대원외고(52명) 등에 이어 전국 5위다.
1908년 개교한 보인고의 변신은 20년 전부터 시작됐다. 다른 사립학교처럼 기업이나 사업가가 재단을 맡고 있던 게 아니어서, 2000년대 들어 학교 재정 위기가 심해졌다. 당시 이사장이었던 창립자의 며느리가 현재 보인고 이사장인 김석한(70)씨를 찾아 “죽고 나서 시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다”며 학교 운영을 부탁했다. 보인고 출신으로 인조 모피 기업 ‘인성하이텍’을 성공적으로 경영한 김 이사장은 2004년부터 학교를 맡았다. 그는 ‘시대가 변했는데 상고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2007년 학교를 일반고로 전환시켰다.
좋은 학교로 만들기 위해선 우수한 교사를 선발하는 게 급선무였다. 김 이사장은 서류, 시험, 강의 시연, 면접 등으로 이어지는 무려 9단계 전형을 거쳐 교사들을 뽑았다. 김 이사장은 “전국 어느 학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교사진을 꾸린다는 생각이었다”며 “한 번은 15명 선발에 1250명이 지원했는데, 그때 차에 항상 이력서를 넣어두고 어딜 가든 이력서 검토를 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또 체육관 신축과 본관 건물 수리 등 학교 환경 개선에 총 320억원을 들였다. 보인고는 2011년 자사고로 전환했다.
김 이사장은 “누군가 ‘기업 경영과 학교 경영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고객 만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며 “학교는 고객인 학생과 학부모를 만족시키면 된다. 이들을 만족시키려면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사교육비를 덜어주면 된다”고 했다.
학교는 저녁 식사 후 6시 1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하는데, 단순히 자습만 시키지 않는다. 개인 연구를 해도 된다. 가령 ‘용수철 탄성 계산하기’ 같은 주제를 정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거나 실험을 한다. 그리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오양욱 교감은 “선생님들이 아무리 생활기록부를 잘 써주려 해도 결국 아이들이 ‘재료’를 가져와야 한다”며 “학교에 책이랑 실험 기자재들이 다 있으니, 방과 후 학생들이 학원에 가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공부, 실험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보인고 1~3학년 총 1100여 명 중 80%는 이런 야간 학습에 자율적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두드러지는 대입 실적을 냈음에도 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을 공부만 잘하는 아이로 만들고 싶진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인성 교육을 강조해, 신입생이 들어오면 ‘어른에게 밝게 인사하라’고 가르친다. 지난 17일 김 이사장이 보인고 교정에서 거닐자, 삼삼오오 학생들은 밝은 표정으로 허리를 90도 숙이며 “이사장님 안녕하세요!”라고 외쳤다. 학교는 또 체력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해, 전교생이 참여하는 반 대항 축구 리그제를 1년 내내 운영한다. ‘오침 시간’도 학교 특색 중 하나다. 전교생이 오후에 30분 낮잠 자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점심 식사 후 나른함을 느끼는 학생이 많으니, 아예 낮잠을 자고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다.
3학년과 신입생 1명씩 조를 짜 ‘멘토링’하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1학년은 공부 방법, 학교 적응 노하우, 고민 같은 걸 3학년 선배에게 물어보면 된다. 이날 1학년 강은규(16)군은 3학년 문호준(18)군에게 “하루 7시간 자며 공부하고 있는데 적당한가요?”라고 물었고, 문군은 “개인마다 적당한 수면 시간은 다 다르니 주말에 6시간, 8시간 등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본인에게 맞는 수면 시간을 찾는 게 좋겠다”고 조언해줬다. 이런 식으로 신입생의 학교 적응을 도와 전학생을 크게 줄였다. 5~6년 전엔 한 학년이 들어오면 1년 안에 30명이 전학을 갔지만, 지금은 1~2명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