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의대 본과 3·4학년 110여명이 유급 결정된 것으로 알려진 11일 서울 고려대 의대에서 학생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고운호 기자

고려대가 의대 본과생 110여 명을 유급하기로 한 데 이어 다음 주 연세대 등 주요 의대에서도 줄줄이 대량 유급 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해 병원 실습에 불참해 온 본과 3·4학년의 유급 기준 시한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 참여율이 낮은 본과 1·2학년과 예과생들도 이달 하순이면 유급 시한이 도래해 유급 의대생 규모는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11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연세대 의대는 지난 7일 본과 4학년 48명에게 유급 예정 통보서를 보냈고 오는 15일 최종 명단을 확정할 방침이다. 아주대와 전남대 의대도 다음 주 중 본과 4학년의 유급이 결정된다. 인하대와 전북대도 본과 3·4학년생들에 대한 유급 여부를 다음 주 결정할 계획이다.

대학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통상 전체 수업 일수의 4분의 1 또는 3분의 1을 이수하지 않으면 유급 처분을 내린다. 보통 유급 여부는 학기 말에 확정돼 학생에게 통보되지만, 이번 집단 유급 사태는 확정 통보가 더 빨라질 수 있다.

전국 40개 의대 학생 90% 이상이 지난달 ‘제적’ 처분을 피하기 위해 1학기 등록은 마쳤다. 하지만 이번엔 수업을 거부하면서 정부에 대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고려대·가톨릭대·성균관대·울산대 등 5개 의대 학생 대표는 지난 9일 공동성명을 내고 “수업 거부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경희대도 최근 학생회 투표를 통해 수업 거부 방침을 세웠다. 주요 의대 가운데 서울대만 본과생 전원이 수업에 복귀한 상황이다.

그래픽=이철원

◇대량 유급 땐 내년에 24·25·26학번 모두 ‘1학년’ 될 수도

본과 3·4학년 단체 유급이 현실화되면 내년 의대 학사 일정에 상당한 차질이 발생할 전망이다. 본과 3·4학년은 병원 실습 위주여서 1학기를 유급하게 되면 1년을 통째로 쉬게 된다. 그 때문에 이들이 대량 유급하게 될 경우 내년에 정상적인 실습 과정을 진행하기 어려워진다. 매년 전국 40개 의대의 임상 실습 정원은 3000명 정도다. 한 국립대 의대 관계자는 “의대생 단체가 정부의 의대 증원 반대 이유로 내세웠던 ‘의대 교육 질 하락’이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로 인해 나타나게 됐다”고 했다.

본과 1·2학년과 예과생 등 의대 전체로 ‘도미노 유급’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본과 4학년은 52주 실습 시간을 이수해야 의사 국가 고시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복귀율이 높은 학년이었다. 하지만 이론 수업 위주인 본과 1·2학년과 예과생은 당장 유급 처분을 받지 않아 수업 거부 비율이 높았다. 특히 예과생과 본과 1·2학년은 학기 중 언제든 들어도 되는 동영상 수업 비중이 높아 대학 측에서 출석률을 확인하기도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현재 전국 40개 의대의 수업 복귀율은 평균 20~30%에 그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금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면 내년에 24·25·26학번이 ‘예과 1학년’으로 함께 공부하는 초유의 ‘트리플링(tripling)’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크다.

대학들은 “올해는 수업에 복귀하지 않는 학생들은 원칙대로 제적이나 유급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의대는 전공 수업에서 한 과목이라도 F학점을 받으면 유급되고, 유급이 누적되면 제적된다. 대학들은 또 ‘수업 방해’ 행위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이다. 최근 경희대 학생회는 투표를 통해 수업 거부 방침을 정했는데, 일부 의대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수업 불참을 종용하기 위해 소셜미디어로 투표 결과를 알리기도 했다. 이에 대학 측은 의대 홈페이지에 ‘수업 방해 행위 민원 접수 및 조치 안내’라는 제목의 공지를 올리고 “최근 교육부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업 거부를 종용하는 메시지를 발송한 수업 방해 행위 사례가 민원으로 접수됐다”면서 “이 건에 대해 학장이 직접 해당 학생에게 엄중 경고하는 등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와 대학 총장들은 내주 초에 2026학년도 의대 모집 인원을 증원 이전(3058명)으로 확정·발표하는 방안을 놓고 막판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부는 의대생들이 ‘정상적인 수업’이 가능한 수준으로 복귀하면 내년도 모집 인원을 증원 전(3058명)으로 조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일부 대학 총장들은 “학생 복귀율이 낮은데 3058명으로 확정하는 건 스스로의 원칙을 깨는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의대 학장들이 “교육부가 ‘증원 0명’을 확정해줘야 의대생들이 정부를 믿고 수업에 돌아올 것”이라고 요구해왔고, 지금 상황에서 ‘5058명(증원 2000명)’으로 바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대학 총장들은 ‘3058명’을 확정하더라도 수업에 복귀하지 않는 학생들은 원칙대로 ‘제적·유급' 조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10일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회장과 만나 의료 정상화와 의대생 복귀에 대해 논의했다. 향후 이 부총리와 조 장관은 직접 전공의와 의대생을 만날 계획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강성 의대생 단체는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된 만큼 수업을 거부하며 투쟁하다가 차기 정부와 협상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면서 “의대생의 집단 행동 기조를 깨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