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9월 로드 FC 55 경기에서 승리한 직후 기념 촬영한 정원희(오른쪽 두번째) 선수. /독자 제공

지난 10일 오후 9시 40분쯤 대구시 동구 한 아파트에서 여성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책을 나온 여성 A(31)씨와 포메라니안 강아지가 들개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순식간에 강아지의 목을 문 들개가 A씨까지 공격하려던 찰나, 오토바이 헬멧을 쓴 한 남성의 왼손이 들개의 목을 휘어잡았다. 남성은 무릎으로 배를 눌러 들개를 제압한 뒤 여성에게 “애(강아지)부터 살려야 하니 빨리 (병원으로)데리고 가라”고 소리쳤다.

해당 남성은 킹덤주짓수 복현지부 소속 로드(ROAD) FC 프로 파이터 정원희(29) 선수였다. 정씨는 16일 본지 통화에서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다 장난으로 친구의 오토바이 헬멧을 뒤집어 쓰고 도망쳤는데 비명 소리를 들었다”면서 “처음엔 치한이 여성을 괴롭히는 줄 알고 달려갔더니 개가 개를 물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정씨는 헬멧을 제외하곤 아무런 보호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정씨는 “물려 있는 조그만 강아지를 보니 이제 100일이 지난 아들이 생각났다”면서 “남 일 같지 않아서 달려갔을 뿐”이라고 했다.

정씨는 전력질주해 큰 개를 제압했다. 무릎으로 상대의 복부를 짓눌러 움직임을 막는 ‘니 온 밸리(knee on belly)’ 기술이 들어갔다. 들개가 이빨을 드러냈지만 정씨가 양손으로 들개의 목을 짓누르자 이내 잠잠해졌다.

정씨는 A씨가 풀려난 강아지를 데리고 물러나는 것을 지켜본 뒤 들개 또한 풀어줬다. 정씨는 “처음에는 (개를) 반 죽이려고 갔는데, 이 개도 소중한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들개는 정씨를 바라보며 뒷걸음을 친 뒤 동네 밖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정씨는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부끄러워서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며 “남편 분이 직접 연락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고 말했다.

부상을 입은 A씨의 강아지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악화돼 죽었다. A씨가 결혼 전부터 키운 강아지로, 습격을 받은 이날은 다섯 살을 맞은 생일이었다.

이 사건은 A씨 남편인 조모(32)씨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다. 조씨는 ‘대구 동구 배달기사님을 찾습니다’라는 글에서 “들개가 작은 개도 아니고 대형견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도와주신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도와주신 덕에 아내가 다치지 않았다. 꼭 찾아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헬멧을 쓴 정씨를 아내 A씨가 배달기사로 착각한 것이었다. 소셜미디어로 공유된 이 글에 정씨는 “강아지가 걱정돼서 댓글을 남겨 놓겠습니다. (아내분이) 무사하다니 다행입니다”라고 글을 달았다.

조씨는 수차례 정씨에게 “사례를 하겠다, 장모님이 식사라도 사드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씨는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모두 거절했다. 조씨는 “타인을 도와주고도 욕먹는 요즘, 용기를 내주신 것만도 감사하다”며 “선수님이 앞으로 잘 되시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통산 전적 5승 5패로 주짓수와 복싱, 무에타이가 장기다. 정씨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파이터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