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피싱(전화 금융사기) 피해자들로부터 현금을 받아 범죄 조직에 송금한 혐의로 기소된 20대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치러진 재판에서 배심원 7명도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내렸다. 이 여성이 현금을 받아 전달하는 행위를 보이스 피싱 범죄로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구지법 형사 11부(재판장 이상오)는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A(21)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29일 밝혔다. A씨는 지난해 11월 피해자 3명에게서 5차례에 걸쳐 7150만원을 받아 보이스 피싱 조직에 전달한 혐의 등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수능 시험을 준비하던 A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하면서 범죄에 연루됐다.
A씨의 이력서를 본 보이스 피싱 조직원 B씨는 “무역회사인데, 영어 과외를 했다는 이력을 보고 연락을 했다”면서 “거래처로부터 수금하는 일을 해주면 된다”고 했다. 또 텔레그램 메신저로 A씨에게 수금 대상자의 인적사항과 인상착의, 수금액 등을 알려주면서 “만날 사람들은 회사 거래처 관계자들이니 대금만 받아서 통장으로 입금해달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그러나 B씨는 보이스 피싱 조직의 일원이었다. 이 조직은 은행 등 금융기관을 사칭해 “저금리 대출이 가능하다”고 연락한 뒤, 피해자가 대출 신청을 하면 잠시 후 금융감독원 직원인 척 다시 전화를 걸어 “금융거래법을 위반했으니 현금으로 기존 대출금을 상환해야 한다” “신용에 문제가 있어 보증금을 현금으로 예치해야 한다”고 속였다.
또 수금을 맡은 A씨가 현장에 도착하면 피해자에게 “(A씨가) 금융감독원 직원이니 돈을 건네주면 된다”고 소개하는 식으로 돈을 가로챘다.
A씨는 결국 피해자의 신고로 수사에 나선 대구 수성경찰서에 검거됐다. 또 대구지검은 지난 4월 A씨를 사기 등 혐의로 기소했다. A씨가 보이스 피싱 조직원들과 공모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A씨가 무고하다고 판단했다. A씨가 현금을 전달하는 행위를 범죄로 인식했다는 증거가 없는 만큼,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미필적 고의란 어떤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도 이를 용인했다는 뜻이다.
재판부는 A씨와 조직원 B씨의 텔레그램 대화 내용에 주목했다. B씨는 A씨를 ‘직원’으로, 피해자를 ‘고객님’으로, 피해금을 ‘대금’으로 지칭했다. 이밖에도 ‘급여’ ‘퇴근’ ‘사원번호’ 등 여느 회사에서 쓰일 수 있는 용어들이 오갔고, 보이스 피싱을 암시하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사기 범행을 의심한 피해자가 A씨를 붙잡았지만 A씨가 도주하지 않고 B씨에게 “어떻게 하면 되느냐”며 지시를 요청한 점, B씨가 “가끔 알바 쓰는 것 때문에 오해하시는 고객님이 계신다”며 A씨를 안심시키고 상황을 해명한 점도 A씨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감안됐다.
A씨가 수금 행위를 범죄로 인지했거나 범죄 행위로써 B씨와 공모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역회사 아르바이트생의 업무로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A씨가 그전까지 별다른 사회 경력은 물론 범죄 전력이 없었던 점 등도 참작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을 미필적이나마 인식했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이상 배상명령을 할 수 없는 만큼 배상신청도 각하한다”고 밝혔다.
보이스 피싱 조직의 현금 수거책 역할을 했음에도 무죄가 선고된 사례는 A씨 뿐만이 아니다. 지난 6월 대법원은 1억 9600만원 상당의 돈을 범죄 조직에 송금한 40대 C씨에게 무죄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A씨처럼 C씨도 송금 행위를 보이스 피싱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 인정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A씨 사례처럼 무죄 판결이 나올 경우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기가 어려운만큼 예방이 최선이라고 입을 모은다. 법무법인 율빛의 구본덕 변호사는 “금융기관은 절대 고객을 직접 만나서 돈을 수금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면서 “범죄 수법이 지능적으로 발전하는만큼 정부와 경찰 등 관련 기관에서 피해 예방 홍보를 지속적으로 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