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 현장에서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가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지난 9일 천모(53)씨가 이 사무실에 불을 지르면서 천씨를 포함한 7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천씨가 지난해 6월 재개발 주상복합아파트 투자금 반환 소송에서 패소한 것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개발 아파트 투자금 반환 소송에서 패소한 데 대한 불만으로 지난 9일 대구 범어동 우정법원빌딩 내 변호사 사무실에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자 천모(53)씨가 방화 약 1시간 전 다른 재판에서도 패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잇따른 소송 패소에 대한 불만이 천씨의 방화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또 7명이 사망한 이번 사건 현장에서 흉기 1점이 발견되고, 사망자 중 김모 변호사와 박모 사무장의 복부 등에서 흉기로 찔린 상처도 발견돼 용의자가 흉기를 휘둘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천씨가 사용한 인화 물질은 휘발유인 것으로 확인됐다.

10일 본지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천씨는 지난 9일 오전 10시 대구고등법원 민사 제2부에서 진행된 추심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천씨는 한 부동산 신탁 주식회사에 자신이 투자한 5억9000여 만원을 지급하라며 항소했지만, 재판부는 “천씨가 제출한 증거만으론 해당 회사가 천씨에게 지급할 채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를 기각했다.

천씨의 변호를 맡은 한모 변호사는 이날 본지 통화에서 “재판 결과가 나오자 천씨는 침울한 표정만 지었고 아무 말이 없었다”면서 “해당 재판 외에도 많은 소송에서 패소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했다. 천씨는 재판 이후 불과 1시간이 지나지 않은 9일 오전 10시 53분쯤 우정법원빌딩 203호를 찾아가 불을 질렀다. 천씨가 방화한 이 사무실 소속 배모 변호사는 지난해 6월 재개발 주상복합아파트 투자금 반환 소송에서 천씨를 상대로 승소한 상대편 변호인이었다. 천씨는 범행 당시에도 “배모 변호사를 죽이겠다”고 외치며 사무실로 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 변호사는 이날 “천씨의 상대 측 변호인을 맡았던 사건은 총 2건”이라고 말했다. 사건 당일인 9일 천씨가 패소한 소송은 배 변호사가 담당하지 않았다.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사건 사망자 위치

대전에 거주했던 천씨는 소송이 있을 때마다 대구에 잠시 머문 것으로 파악됐다. 천씨는 범어동의 한 14평 규모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천씨의 집은 월세 40만원 내외”라고 말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전날 실시한 1차 현장 감식에서 확보한 연소 잔류물을 감정한 결과 휘발유 성분이 검출됐다고 10일 밝혔다. 경찰은 이날 진행된 2차 현장 감식에서 유리 용기 3점, 휘발유가 묻은 수건 등 잔류물 4점을 추가로 수거해 성분 감정을 의뢰했다. 경찰은 천씨가 유리 용기에 담은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대구경찰청은 이날 “김모 변호사와 박모 사무장의 복부 등에서 흉기로 찔린 상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범행 현장에선 11㎝ 길이 칼 1점과 혈흔도 발견됐다. 경찰은 이 칼이 범행 도구로 쓰였는지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경찰은 천씨가 불을 지르기 전후로 흉기를 휘둘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들이 천씨에 맞서 탈출을 시도했는지, 천씨가 입구를 봉쇄하고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조사 중”이라고 했다.

방화 직전 용의자 - 9일 발생한 대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화재 사건 방화 용의자가 CCTV 영상에 찍힌 모습. 용의자가 흰 천으로 덮은 물건을 들고 건물 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독자제공

본지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천씨는 출입구에서 조금 들어간 사무실 안쪽에서 발견됐다. 천씨를 제외한 나머지 사망자 6명은 출입구에서 비교적 먼 곳에 있었다. 이 중 김모 변호사는 사무실 내 자신의 책상 근처에서 발견됐다. 이 때문에 천씨가 흉기를 휘두르는 것을 피하는 과정에서 불이 나 피해자들이 탈출하지 못해 피해가 커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날 용의자 천씨를 제외한 피해자 6명의 빈소가 마련된 대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엔 유족과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모 변호사의 친구이자 유족 대표인 배모(58)씨는 “김 변호사는 울진 산불 당시 성금을 보냈고 무료 변론도 많이 맡을 만큼 주변을 잘 챙겼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재판 일정 때문에 사무실에 있지 않아 화를 면했던 배 변호사는 이날 빈소에 들러 조문했다. 한동훈 법무장관도 이날 저녁 빈소에 들러 조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