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이 산불로 전소돼 폐허가 되어 있다. /뉴시스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이 산불로 전소돼 폐허가 되어 있다. /뉴시스

예순 살 아들은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26일 오후 경북 영덕군 영덕전문장례식장에 차린 이모(89)씨와 권모(86)씨 부부 빈소에서 만난 아들 이모(60)씨는 “불이 나서 남들 구하러 갔다가 정작 내 부모는 챙기지 못했다”며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농사를 짓던 이씨 부부는 전날 오후 10시 대피령을 듣고 산불을 피하다가 화마(火魔)를 이기지 못했다. 아들 이씨는 전날 오후 6시 재난 문자를 받고 곧바로 영덕군민운동장으로 달려가 대피 차량들을 안내했다. 화물차 운전자인 그는 수년째 지역에서 교통 안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의성에서 넘어온 불길이 영덕읍으로 번지자 ‘부모님이 잘 계실까’ 하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러나 이씨 아내가 오후 10시쯤 부모 댁에 달려갔을 땐 불길이 집 전체를 삼킨 이후였다. 부모는 집에서 50m 떨어진 인근 밭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이씨는 “90세 가까운 노인인데도 아버님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 짊어지고,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에 갈 정도로 활력이 넘치셨다”며 “부모님 유언도 못 듣고 보낸 게 한스럽다”며 고개를 떨궜다.

모두 타 내려앉은 집 앞에서 망연자실 - 26일 오후 경북 영양군의 한 마을에서 주민 2명이 산불에 타버린 집을 바라보고 있다.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안동, 청송, 영양까지 번졌다. 산림 당국은 경북 지역에서만 주택, 공장, 창고 등 최소 234곳 건물이 불에 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뉴스1

경북 의성에서 안동·청송·영덕·영양 등으로 번진 대형 산불과 관련해 숨진 21명(조종사 1명 제외) 상당수는 80대 이상 고령층이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불길을 피하려다 주택과 도로 등에서 불에 휩싸인 것으로 나타났다. 영덕군에서 이씨 부부처럼 산불 관련으로 사망한 이는 총 8명. 전부 80~100세 이상 고령이다. 영덕읍의 한 요양원에선 직원 2명이 몸이 불편한 입소자 4명을 보호하며 함께 차를 타고 대피하다 차에 산불 불씨가 옮겨붙어 폭발했다. 두 직원이 재빨리 입소자 1명을 구조했지만 나머지 입소자 3명은 차 안에서 폭발에 휘말려 숨졌다. 사망자와 함께 살던 자녀들이 외부에서 일하거나 다른 일을 보다가 미처 부모와 다시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3명이 숨진 청송군에서도 희생자는 모두 60~80대였다. 사망자가 4명으로 늘어난 안동시 임하면, 임동면 등에서도 희생자는 대부분 주택 마당에서 질식한 채 발견됐다. 이들을 발견한 것도 대피하던 마을 주민들이었다. 청송군 자택에서 사망한 이모(79)씨는 가족과 따로 사는 독거 노인이었다. 이장 박형락(59)씨는 “혼자 사는 이씨가 골다공증이 심해 이씨를 외부 주택으로 옮기려고 애썼다”며 “죽어도 내 집에서 죽겠다고 하시더니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영덕군은 전날 오후 5시 54분부터 이웃한 청송군에서 산불이 넘어오면서 영덕읍, 지품면, 축산면, 영해면 등 2만ha(6050만평) 규모가 불에 탔다. 영덕군 전체 면적의 27%다.

영양군에서는 석보면 포산리 삼의계곡에서 삼의리 권모(64) 이장이 아내, 처남댁과 대피하다 숨진 채 발견됐다. 권 이장 등 3명은 대피소 방향이 아닌 불길이 덮친 삼의리로 향한 것으로 조사됐다. 영양군 관계자는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을 권 이장이 확인하려 한 게 아닌가 추정한다”고 했다. 석보면 화매리에서도 산불에 휩싸인 주택에서 60대 여성 시신이 발견됐고, 26일 오전 불에 탄 여성 시신 2구가 더 발견돼 총 6명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영양군에선 사망자 6명 모두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됐으며, 모두 산불 피해자로 확인됐다.

26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삼의리 삼의계곡에 전날 발생한 산불에 불탄 차량이 보존돼 있다. 이 차량 인근에서 산불 대피하다 숨진 3명이 발견됐다./연합뉴스

불길이 번진 안동시는 24개 읍·면·동 중 17개 읍·면에서 주민 4052명이 대피했다. 이곳에서 만난 일직면 광연리 주민 류경숙(74)씨는 “창고처럼 이용하던 컨테이너가 다 탔다. 옷만 몇 벌 갖고 나왔다”며 “집에 전기와 수도가 차단돼 들어가서 생활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안동시에선 초등학교 강당과 다목적 체육관 등을 개방해 15~20곳 정도 대피소를 운영 중이다. 안동 체육관엔 텐트 150동이 설치됐고 350여 명이 머물고 있었다. 이날 오전 대피소 식당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끓인 미역국과 김치를 이재민들이 식판에 받아 먹고 있었다. 안동 길안면 묵계서원 인근 단독주택에서 모친 전분홍(87)씨와 함께 50년 넘게 살았다는 김모(53)씨는 “산불로 집이 다 타버렸는데 보상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차량들이 몰리는 바람에, 여기까지 집에서 5분 걸릴 거리를 2시간 걸려 도착했다. 난리가 따로 없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