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설계사인 A사는 최근 고객사와의 수주 협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주를 위해선 100명 이상 인력이 1년가량 개발에 매진해야 하는데, 주 52시간제에 가로막힌 탓에 고객사에 개발 완료 시점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 52시간 예외를 적용받는 ‘특별 연장 근로’ 제도를 이용하자는 내부 의견도 있었지만, 승인 절차 등이 까다롭다는 문제 등이 제기돼 결국 신청하지 못했다.
19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업무량 폭증 등을 이유로 주 12시간을 추가 근무할 수 있는 ‘특별 연장 근로’ 제도를 이용한 경우는 5230건으로 나타났다. 특별 근로 제도 이용이 가능한 5인 이상 사업체가 약 77만5000개에 달하는 걸 감안하면, 0.7%만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연구·개발(R&D)을 사유로 특별 연장 근로를 승인받은 경우는 같은 기간 단 28건에 그쳤다. 지난 11일 여당에서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 근로자를 ‘주 52시간 근로’ 예외로 인정하는 내용의 반도체 특별법을 발의하자, 야당과 노동계 일각에서 특별 연장 근로 제도를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반대해 왔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비판을 한 셈이다.
특별 연장 근로 이용이 저조한 건 승인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대부분 기업에 돌발 상황이 상시 발생하는데, 인원과 사업 내용을 미리 특정한 뒤 고용노동부 장관 승인까지 사전에 받아야 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업무량이 폭증한다 해도 매년 반복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기업이 입증해야 하는 점도 제도 이용을 가로막고 있다.
특별 연장 근로는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특별한 사정’을 승인받으면 1주 12시간의 연장 근로가 가능한 제도다. 당초 ‘주52시간 체제’의 보완제로 여겨졌다.
기업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승인을 받으려면 ①재해, 재난 ②인명, 안전 ③돌발 상황 ④업무량 폭증 ⑤연구·개발 등 다섯 가지 분야 내에서 ‘특별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기업들이 주로 신청하는 사유는 업무량 폭증과 연구·개발인데, 이 분야에서 특별한 사정을 입증하는 건 만만찮다.
실제 기업들은 일이 폭증하는 업무와 인원을 특정하는 데부터 애를 먹는다. 한 제조 업체 관계자는 “보통 업무가 수개월 진행되다가 바뀌기도 하고, 부서 간 협업도 계속되는데 특정인을 초과 근무자로 미리 분류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업무와 인원을 특정한다 해도 예외적 사항임을 입증해야 한다. 제조업 B사의 경우 올 초 신제품 발매 행사에 맞춰 업무량 폭증을 이유로 근로시간 연장을 신청했지만 반려됐다. 반려 사유는 ‘신제품 행사는 매년 진행되는 통상적 업무에 해당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B사 관계자는 “통상적이지 않은 업무는 예측이 어려운데, 미리 서류를 내고 승인을 받으라는 건 말이 안 맞는다”고 했다.
사업장별로 신청서를 받지만, 1년간 총사용량이 90일로 정해져 있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자동차 업체인 C사 관계자는 “하나의 사업장 내 복수의 공장이 있는데, 올 초 1공장에서 연장 시간을 모두 써버린 탓에 2공장에선 사용하지 못했다”고 했다. 일부 기업은 “심사 업무를 맡은 각 지방고용노동청, 담당자별로 적용 기준이 다소 다르다”는 어려움도 토로한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균일한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사정이 급할 경우 ‘사후 승인’ 제도도 운영하고 있으며, 연구·개발 분야는 추가 심사를 거쳐 연장 적용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승인 없이 연장 근로를 시키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 2000만원 이하’의 벌칙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벌칙이 세기 때문에 급하다고 ‘사후 승인’ 제도를 믿고 연장 근로를 시키는 것은 너무 부담스럽다는 게 기업 측 주장이다.
‘추가 심사’의 경우 본심사보다 더 까다로워 서류 내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대만 반도체 기업 TSMC 연구소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미국 엔비디아도 특정 기간엔 주 7일 일하고 있다”며 “핵심 인력은 대체 불가한 경우가 많아 추가 인력을 투입하는 방식만으로는 개발 진도를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여당이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지난 11일 내놓은 반도체 특별법의 경우 연구·개발 종사자에 대한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를 담고 있다. 노동계 등에선 이를 두고 “편법으로 규정보다 많은 양의 근무를 시키면서 52시간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것”이란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특별법은 노사 합의를 거칠 때에만 52시간 적용 제외가 가능하므로 지나친 우려라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특별 연장 근로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특별법 등을 통해 구제에 나서는 건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