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에서 밥상 차려 줬다. 떠먹는 건 노동조합이 해야 할 일이다. (지도부는) 당장 보충 교섭 요구하라.”
최근 한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뿌린 소식지에 실린 말이다. 휴일·시간 외 수당 등을 계산할 때 기준이 되는 통상 임금과 관련해 대법원 판례가 새로 나왔으니, 수당을 올려 받을 수 있도록 회사를 압박하라는 취지다.
작년 12월 23일 대법원이 11년 만에 통상 임금 범위를 종전보다 확대하는 판결을 내린 데 대한 후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대법원은 정기적으로 지급된 명절 상여금이나 정기 상여금이 ‘지급일 기준 재직자에게 준다’ 등의 조건이 붙어 있어도 모두 통상 임금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기존에는 이런 조건 없이 지급되는 것만 통상 임금으로 인정했는데,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통상 임금은 각종 수당 등을 계산할 때 기준이 되다 보니, 주요 기업 노조들은 이번 결정을 바탕으로 “그간 덜 받은 돈(수당 등)을 받아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영계와 노동계에선 올해 노사 단체 협상의 뜨거운 감자로 통상 임금을 꼽고 있다.
지난해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 낸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는 판결 직후 “권리 쟁취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했다. 현대차노조는 매년 기본급의 750%를 받는 상여금 전부를 통상 임금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고, 이미 이 중 150%는 통상 임금에 추가로 포함하기로 지난 3일 노사가 합의했다. 대법원은 지난달 새 기준을 내놓으면서 ‘소급 적용은 안 된다’고 했지만, 현대차 노조는 과거 소급분까지 받아내겠다는 방침이다. 기아차노조는 통상 임금 기준이 잘못돼 각종 수당이 누락됐다며 소송을 준비 중이다. 지난 24일까지 소송 신청을 받았는데, 조합원 약 2만명이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노총 금속노조는 지난달 26일 산하 지부에 통상 임금과 관련된 기존 노사 합의를 원천 무효로 하고 회사 측에 ’2024년도 미사용 연차 수당’부터 올려 받아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수당은 연초에 지급되는데, 통상 임금 범위가 확대된 만큼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미사용 연차 수당도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금속노조는 회사가 이를 거부하면 임금 체불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고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하라는 등 구체적 방법까지 안내했다.
실제 판결도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 13일 IBK기업은행 노조와 퇴직자 1만1202명이 ‘600% 정기 상여금을 통상 임금에 포함시켜 달라’며 낸 소송에서 회사 측 손을 들어준 2심을 깨고 파기 환송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지난 23일 세아베스틸 전현직 근로자 12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 임금 소송에서도 근로자 측 주장을 상당 부분 인정하며 사건을 다시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기업들은 비상이다. 대법원에서 사실상 패소 판결을 받은 IBK기업은행은 퇴직자 등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만 775억원에 달한다. 다른 시중은행 대부분도 현재 정기 상여금을 통상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비슷한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 완성차 제조 업체의 경우 현재 정기 상여금을 연간 기본급의 900%씩 지급하고 있다. 이를 통상 임금에 포함하면 통상 임금이 지금보다 80% 정도 올라갈 것이란 내부 추산이 나온다. 이 경우 통상 임금을 바탕으로 계산하는 시간 외 수당, 휴일 수당도 줄줄이 올라가게 된다.
한 중견기업은 이번 판결로 정기 상여금 등을 통상 임금에 포함하면 생산직 임금이 10%가량 올라가는 효과가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연봉 1억원인 직원은 1000만원 인상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제 와 이러면 어떡하느냐”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기업들은 2013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정기 상여금은 통상 임금에 넣지 않았고, 이를 전제로 취업 규칙을 만들고 노조와 단체협약을 맺어 왔다. 법조계 일부서도 “불과 11년 만에 판례를 폐지한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친 것” “입법으로 해결할 문제를 판결로 해결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기업들이 일종의 편법으로 통상 임금을 줄여온 측면이 있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이를 바로잡겠다는 취지”라며 “근로감독관과 노사가 참고할 수 있는 정부 가이드라인을 조만간 낼 방침”이라고 말했다.
☞통상임금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급여. 휴일근로를 하게 되면 통상임금의 50%를 더해 수당을 지급하는 등 각종 법정 수당과 퇴직금을 계산할 때 기준이 된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에 급여 중 어디까지 통상임금인지에 대한 정의가 없어 노사 간 해석을 놓고 갈등을 빚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