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특별법’이 국회 통과에 난항을 겪자, 정부가 연구·개발(R&D) 분야 특별 연장 근로 기간을 현재의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기로 했다. 대신 이 경우 근로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6개월마다 건강검진을 받도록 의무화한다. 정부는 이 같은 방침을 사실상 확정하고, 이르면 12일 경제 관계 장관 회의를 거쳐 발표할 계획으로 11일 알려졌다.
국민의힘이 지난해 발의한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산업에 재정을 지원해 주고, 반도체 연구직은 주 52시간제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골자다. 정부는 당초 국민의힘 발의안대로 반도체 특별법에 주 52시간 적용 예외가 포함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노동계 등의 반대로 입법이 지연되자 보완책으로 이날 특별 연장 근로 규제 완화 카드를 내놓았다. 법을 바꾸지 않고도 정부 차원에서 풀 수 있는 규제는 최대한 풀어주겠다는 취지다. 민주당 지도부도 반도체 산업 연구직의 특별 연장 근로를 6개월로 늘리는 방안을 긍정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 연장 근로는 주 52시간의 예외를 적용받아 주당 64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는 제도다. 반도체 연구·개발의 경우 지금도 3개월씩 총 3번을 연장해 최대 12개월의 특별 연장 근로를 쓸 수 있다. 1회당 기간이 3개월인 셈인데, 이를 6개월로 늘리겠다는 것이 정부 구상이다. 회당 허용 기간은 고용부 지침에 내용이 담겨 있어 별도의 법령 개정이 필요 없다.
반도체 업계에선 “주 52시간제의 경직성을 해결할 근본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나마 한숨 돌렸다”는 반응이 나왔다.
◇“근본 해결책 아니지만 반도체업계 숨통 트여”
정부의 이번 특별 연장 근로 기간 확대 대책은 반도체 산업 위기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나왔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경기 성남시 판교에서 반도체 업체들과 간담회를 갖고 “기술 전쟁은 결국 시간 싸움인데 미국·일본·대만은 국운을 걸고 반도체 생태계를 육성 중이고, 중국은 우리 주력인 메모리를 턱밑까지 쫓아왔다”며 “우리 반도체 업계만 근로시간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반도체 업체들은 주 52시간 규제로 연구·개발 성과가 떨어진다는 어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 장관과 함께 간담회에 참석한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업계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행 (특별 연장 근로) 3개월은 연구·개발 성과가 나오기엔 짧은 기간이고, 6개월 정도면 기업도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정부는 특별 연장 근로 신청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안 등도 검토 중이다. 다만 근로자 개별 동의를 받게 돼 있는 현재의 규정은 유지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6개월짜리 특별 연장 근로를 쓸 경우 근로자가 건강검진을 받도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추가한다. 현재는 근로자가 요청할 경우에만 건강검진을 해주게 돼 있다.
이런 내용 역시 기간과 마찬가지로 고용부 지침에 담겨 있어 법령 개정 없이 빠른 시간 안에 적용할 수 있다. 김문수 장관은 “행정 조치여서 오래 걸리지 않는다. (확대 적용에) 한 달도 안 걸릴 수 있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그동안 ‘반도체 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민주당은 반도체 특별법에서 주 52시간 적용 예외 내용을 빼고, 특별 연장 근로를 활용하면 된다고 주장해 왔다. 반도체 특별법을 둘러싼 여야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도 지난달 24일 특별 연장 근로를 지금보다 완화된 조건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절충안으로 제안했다. 정부 대책 방향에 대해 여야 모두 동의할 여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이날 “그나마 숨통이 트이게 됐다”는 반응이 나왔다. 기업들이 특별 연장 근로 기간이라도 늘려달라는 안을 ‘플랜 B’로 정치권에 요구했는데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한 반도체 기업 고위 관계자는 “프로젝트를 할 때 개발 인력을 더 유연하게 투입하고 운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핵심 인력들이 시간 제약을 덜 받고 집중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도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시방편일 뿐 반도체 업계의 근본적 문제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반도체 특별법이 애초 특별 연장 근로 등 기존의 52시간제 보완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취지에서 추진됐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칩 성능을 좌우하는 초미세 공정 기술과 반도체 신소재·장비 개발을 위해선 6개월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속도가 생명인 반도체 분야에서 근무시간 제약 자체를 두지 않는 더 과감한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며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근무시간을 통제하겠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반도체 52시간 예외’ 적용안을 계속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 연장 근로
고용노동부에서 주 52시간제 예외를 인가받아 최대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제도. 근로자 동의가 필요하며 재해·재난이나 생명 보호, 기계 고장 등 돌발 상황, 업무량 급증, 연구·개발(R&D) 등 다섯 가지 사유로 신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