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 연구·개발(R&D) 분야 특별 연장 근로 허용 단위 기간을 현재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기로 확정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반도체 특별법’이 국회 통과에 어려움을 겪자 임시방편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는 12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경제 관계 장관 회의를 열고 이런 내용을 확정·발표했다.
특별 연장 근로는 ‘주 52시간제’의 예외를 인정해서 주 최장 64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는 제도다. 개별 근로자 동의를 받은 뒤 고용노동부 장관 인가를 받으면 쓸 수 있다. 정부는 반도체 연구·개발 부문은 1회 인가 기간이 6개월인 특례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지금처럼 3개월씩 쓰면서 1년에 3번 연장하든지, 아니면 6개월짜리 특례를 통해 1년에 1번만 연장하든지 기업에 선택권을 추가로 주겠다는 것이다.
다만 6개월 특례는 시작 후 1~3개월은 종전 제도처럼 주 최장 64시간 근무가 가능하지만, 이후 4~6개월은 주 최장 60시간 근무만 허용하기로 했다. 또 6개월 특례를 사용할 경우 근로자의 건강검진을 해주도록 의무화했다. 근로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근로자 건강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겠다는 취지다. 또 연장을 위한 심사도 일부 간소화하기로 했다. 새로 만든 특례를 활용해 일을 더 시키고 돈은 주지 않는 악용 사례 등을 막기 위해 불법 신고 온라인 센터도 운영할 계획이다.
이런 방침은 고용부 내부 지침만 수정하면 되기 때문에 다음 주면 적용될 전망이다. 조속한 시행을 독려 중인 김문수 고용부 장관은 “반도체 업계가 망하기 전에 (제도 지원을) 하느냐, 망하고 나서 뒷북을 치느냐 하는 시점”이라며 “행정적 땜질이라도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겠다”고 했다.
이날 정부 발표에 한국경제인협회, 경영자총협회 등 경제 단체도 일제히 환영 입장을 냈다. 하지만 산업계에서는 임시방편이라는 지적도 많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례 대상이 연구·개발로 한정돼 있는데, 제조 등 다른 공정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는 만큼 협업이 필요할 때는 다른 분야도 함께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 역시 “이날 대책은 국가 전략 산업인 반도체 산업을 살릴 응급 조치”라며 “근원적으로는 52시간 예외 조항이 포함된 반도체 특별법이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했다. 경총도 이날 “근로시간 제도 유연화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특별 연장 근로 제도가 애초 주 52시간제의 경직성을 보완하는 임시 대책으로 확대돼 온 만큼, 주 52시간제가 대표하는 근로시간 제도의 전면 개편이 근본 대책이라는 것이다.
산업 현장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꽉 막혀 있는 주 52시간제를 더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인 ‘리벨리온’의 신성규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11일 정부 간담회에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비행기 안에서 와이파이를 통해 일하지 않으면 개발 속도가 느려져 와이파이가 터지는 비행기만 탄다”며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 반도체 스타트업에게는 유연한 근무제도가 더욱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조선업, 배터리 등 다른 업종에서도 주 52시간 규제 완화 요구가 계속 나온다. 한 중소 조선 업체는 “어느 시점에 특별 연장 근로가 필요할지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 보니 정말 급하면 그냥 주 52시간제를 위반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exemption∙면제)’이라는 제도로 고소득 사무직군 근로시간 규제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계는 “노동자 의견이 배제됐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노총은 “주 52시간제 입법 취지를 정부가 나서 무력화하고 걸레짝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민주노총은 “자본의 이윤 보장을 위해 노동자 건강을 파괴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특별 연장 근로
고용노동부에서 주 52시간제 예외를 인가받아 최대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제도. 근로자 동의가 필요하며 재해·재난이나 생명 보호, 기계 고장 등 돌발 상황, 업무량 급증, 연구·개발(R&D) 등 다섯 가지 사유로 신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