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출소장 딸을 강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정원섭(87)씨가 지난 28일 세상을 떠났다. 정씨는 관객 수 1281만명을 기록한 영화 ‘7번 방의 선물’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정씨의 비극은 1972년 9월 27일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 한 논둑에서 아홉 살 A양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A양은 성폭행을 당한 뒤 목이 졸려 살해됐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했고, 김현옥 내무부 장관은 “10월 10일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않으면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며 시한부 검거령을 내렸다.
경찰은 A양이 만홧가게에 간다며 외출한 점과 A양 주머니에서 만홧가게 TV 시청표가 발견된 점 등을 들어 만홧가게 주인 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은 시한부 검거령 마지막 날인 10월 10일 “정씨에게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고 발표했다.
정씨는 수사 과정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가 만화방에 온 적이 없다”며 범죄 사실을 모두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경찰은 정씨에게 모진 고문을 가했고, 거짓 자백을 이끌어냈다. 경찰은 정씨 아들의 하늘색 연필을 압수해 연필이 마치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것처럼 증거를 조작하기도 했다. 정씨는 강간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이듬해인 1973년 3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8월과 11월 서울고법과 대법원에 각각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강간 살인마’ 누명을 쓴 채 정씨는 1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1987년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정씨는 가석방 이후 고향인 춘천을 떠나 전북에 터를 잡았고, 신학 공부 끝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99년 11월에는 누명을 벗겠다며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2001년 10월 법원은 기각했다. 정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겠다”며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찾아 결백을 호소했고, 2007년 12월 재심 권고 결정을 이끌어냈다.
정씨는 재심 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유력한 증거가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그를 조사했던 한 수사관은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 방청석으로 돌아가던 중 정씨를 향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고문과 증거 조작의 미안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재심을 맡은 춘천지법은 2008년 11월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댄 법원마저 적법 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다. 과거 판결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2011년 정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당시 정씨는 “용서를 하되 명예롭게 용서하기 위해 재심을 청구했고, 이제는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지난 2014년 허위 자백을 강요한 경찰과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16년 서울중앙지법 민사45부는 허위 자백을 강요한 경찰 3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해 23억88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재판부는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재심 무죄 확정 후 6개월 안에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였다. 정씨는 6개월에서 단 10일이 지나 국가의 배상 책임을 묻지 못했다. 23억원의 배상금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고법에 계류 중인 항소심 재판에서 경찰 측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고 주장할 경우 승소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씨의 별세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표창원 전 국회의원은 “공정한 하늘에선 억울함 없이 편안하게 쉬시길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