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활동한 A(24)씨는 “페미니즘 활동을 한다는 소문이 날까 봐 학생들 붐비는 점심시간엔 동아리방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누군가 보고 ‘쟤는 페미다’라는 소문을 퍼뜨린 전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석순 부원들은 신상이 털릴까 철저히 가명(假名)으로 활동했다. 현재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는 그는 “페미니스트인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페미라는 이유로 욕설을 퍼붓는 주변 학생들이 무서웠다”고 했다.
‘자유로운 학문 공동체’로 불리던 대학가도 젠더 갈등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페미니즘 강의가 학생 수 부족으로 폐강되고, 여학생 휴게실은 ‘남성 차별’이란 공격을 받는다. 학생들은 “군대와 페미니즘은 금기어가 됐고, 남녀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고 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성학 강의에 대한 관심 저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등을 계기로 페미니즘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지만, 남성들 반발이 거세지면서 강단 위 여성학이 길을 잃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건국대에서 ‘페미니즘과 성’을 강의할 때 매 학기 100명 정도였던 수강생이 2021년 30명으로 줄더니, 내가 학교를 떠난 뒤엔 연달아 폐강됐다”고 했다. 서울권 사립대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다른 교수도 “상당수 여학생은 페미니즘 수업을 들으면 취업에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남학생도 ‘왜 그런 수업을 듣느냐’는 낙인이 찍힐까 걱정한다”고 했다. 서울대 여성학 관련 강의 수는 2004년 26개에 달했지만, 2020년에는 12개로 줄었다.
대학가를 휩쓴 ‘단톡방 성희롱’ 사건도 남녀 불신을 심화시킨 원인이다. 경희대 재학생 정모(25)씨는 “친했던 남자 선배가 여학생들 몸을 불법 촬영한 일이 있었는데, 나도 피해자였다”면서 “남학생이 휴대전화만 들고 있으면 불안해진다”고 했다. 충북대에선 2020년 ‘단톡방 성희롱’에 연루된 남학생 13명이 무더기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지난해 한국항공대에선 남학생들이 여학생과 교직원을 상대로 “몸캠 찍어 협박하자”는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서강대 인문대학 한 학과의 18학번은 남녀 동기들끼리 말을 거의 섞지 않는다고 한다. 신입생 시절 한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너는 여자치고 손이 크다”고 했다가 학과 전체의 분란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이 학과 이모(23)씨는 “여자들은 ‘성차별적 발언 아니냐’고 하고, 남자들은 ‘별생각 없이 뱉은 말에 꼬투리 잡는 것 아니냐’고 맞섰다”면서 “이후로 상대 성별과는 어울리지 말자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했다. 고려대 21학번 권준혁(20)씨는 “여자 동기들은 군대 얘기 꺼내는 걸 조심스러워하고, 남자 동기들도 ‘얼평(얼굴 평가)’으로 비칠 만한 얘기는 거의 안 한다”고 했다.
불똥은 ‘여학생 휴게실’로도 튀었다. 여학생 휴게실은 대학에 여성이 소수였던 시절 성폭력 방지를 위해 설치됐지만, 남녀 비율이 비슷해지면서 ‘남성 차별’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서울대는 2016년, 성균관대는 2017년에 남학생 휴게실을 신설했다. 경희대는 2019년 중앙도서관 내 여학생 열람실을 폐지했다. 남학생들이 ‘남성 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고 인권위는 ‘성차별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교수들은 남녀 갈등의 격화가 수업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했다. 최근 한 대학에서 ‘젠더와 법’ 강의를 시작한 최모(43) 강사는 “선배 강사들이 ‘페미니즘 강의는 남녀 학생 모두 온갖 트집을 잡아 난리를 친다’며 아무도 맡지 않더라”면서 “교수들은 ‘유명한 교재 하나 잡아 그걸 읽기만 해라. 네 생각은 보태지 마라’는 조언을 했다”고 했다. 윤김지영 교수는 “수업 중 ‘여성’이란 말만 들어가도 남성은 왜 소외시키느냐며 반발한다. 과거엔 ‘여성이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고 설명했을 내용을 최근엔 ‘유럽에서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여성 차별이 남아있지 않겠느냐’고 돌려 말한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김연주 사회정책부 차장, 변희원 산업부 차장, 김경필 정치부 기자, 유종헌·유재인·윤상진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