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남편과 사는 임모(66)씨는 오전 8시 반 아침상을 차리고 집 안 청소를 한 다음, 다시 점심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 오후가 되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세 살짜리 외손녀를 맞아 딸이나 사위가 퇴근할 때까지 돌본다. 2주에 한 번 주말에는 경북 포항의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수발한다. 그는 “40년 넘게 양육과 가사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밥을 자기 손으로 차려본 적 없는 남편의 세끼를 준비하면서 손주와 노모까지 돌봐야 하니 주말도 없이 일하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결혼 전까지 다닌 은행을 그만둔 것도, 남편에게 요리를 가르치지 않은 것도 후회한다고 했다.

1940~60년대에 태어난 노년 여성들은 우울증이 깊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우울증 진단을 받은 남성은 20대(5만1919명)가 가장 많았던 반면 여성은 60대(9만6249명)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남성의 경우 우울증 발병률이 40·50대와 60대 사이에 큰 차이가 없지만, 여성의 경우 60대에 들어서면 우울증 발병률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들 세대는 강력한 남아 선호 사상과 가부장제로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를 갖기 어려웠고, 주로 육아와 가사 노동에 전념했다. 문제는 과거의 고정적 성 역할 때문에 맡은 가사·육아 부담이 노년에도 지속된다는 것이다. 남편이 퇴직하면서 차려야 할 끼니가 늘고, 자식의 경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손주도 돌봐야 한다. 친정 부모나 시부모가 살아있는 경우엔 간병까지 삼중고를 겪는다.

공공 보육 시설의 부족은 30·40대 여성의 경력 단절뿐 아니라 노년 여성의 삶의 질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보건복지부의 ‘2018년 보육 실태 조사’에 따르면, 양육에서 도움을 받는 가정의 83.6%는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조부모 중에서도 할머니가 육아를 분담하는 비율이 높다. 아이를 많이 안는 이들에게 생겨서 ‘육아병’이라 불리는 손목터널증후군 환자의 75%가 50대 이상이다.

노년 여성에게 편중된 육아로 가정 내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팀이 지난해 만 19세 이상 일반 국민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임신·육아로 가정에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데 공감하느냐’는 질문에 60대의 92.8%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교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강모(65)씨는 수영과 민화를 배우려고 어린 손주를 돌봐달라는 딸의 요청을 거절했다. 딸은 1년째 강씨와 왕래하지 않고 있다. 강씨는 “직장 생활과 육아, 가사를 하며 어머니와 아내로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딸의 사정은 딱하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성 평등 의식 높은 딸이나 며느리 때문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수행해온 명절 노동을 딸이나 며느리에게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과 자영업을 했던 최모(68)씨는 “며느리들이 맞벌이라 제사 때 오지 않는다. 제삿날 아침에 ‘못 가서 죄송하다. 제비는 부쳤다’고 전화 오는데, 지난번에는 아예 전화도 없더라. 혼자 제사 준비를 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한심했다”고 말했다. 의사인 딸의 두 아이를 돌보다 허리를 다친 이모(65)씨는 “나는 어릴 때 공부도 잘했는데 오빠들 학비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가고 지방대 나와 교사를 하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뒀다. 내 딸만큼은 멋진 전문직 여성으로 키우고 싶었는데 그 때문에 이 나이까지 고생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김연주 사회정책부 차장, 변희원 산업부 차장, 김경필 정치부 기자, 유종헌·유재인·윤상진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