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를 운행하는 한국철도(코레일)가 오는 7월 31일부터 서울(청량리)~강릉 간 KTX-이음 열차를 ‘무정차’ 운행하기로 하면서 새삼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4선·강원도 강릉)의 파워가 회자되고 있다. 코레일은 지난 7월 4일, “청량리~강릉 간 KTX-이음 4회를 주말에 한해 무정차로 시범 운영한다”며 “해당 열차의 서울역~강릉 간 소요시간은 2시간에서 1시간40분, 청량리역에서는 1시간20분으로 줄어든다”고 밝혔다.
코레일의 열차운행시각 변경은 강릉에서 내리 4선을 한 권성동 의원의 요청으로 알려졌는데, 권성동 의원실 역시 같은 날 이 같은 소식을 알려왔다. 권성동 의원은 “강릉선 KTX-이음 무정차 도입 및 증편을 통해 아름다운 강릉 관광지에 보다 많은 방문이 이뤄지길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국토부 및 코레일과의 긴밀한 업무 협의를 통해 강릉의 교통망 확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코레일의 열차시각표 변경을 다른 지역구 의원들은 부러운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KTX가 이용하는 선로와 열차공급에 한계가 있는 터라, KTX를 자기 지역구에 정차시키거나 증편하는 것은 차기 선거에서 당선을 보장하는 ‘업적’으로 여겨진다. 한데 무려 서울(청량리)에서 강릉까지 200㎞ 이상을 논스톱으로 달리는 ‘무정차 운행’을 만들어낸 것. 익명을 요구한 한 지역구 의원은 “서울(청량리)~강릉 구간이 서울~부산과 같이 출장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비즈니스 노선도 아닌데 무정차 운행을 할 것까지 있느냐”며 “공공기관 평가에서 낙제점(E등급)을 받은 코레일 입장에서는 권성동 원내대표의 요청을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코레일, 권성동 요청 거부 힘들어”
코레일은 ‘시범 운영’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주로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서울(청량리)~강릉 간 노선에 무정차 KTX를 투입하는 것은 전례 없는 파격이다. 지난 2010년 경부고속철 2단계 개통(동대구~부산) 직후 서울~부산 간 무정차 KTX를 투입한 적이 있지만, 2015년 호남고속철 개통과 함께 종료한 바 있다. 경부선 KTX는 서울에서 대전까지 무정차로 운행하는 일부 편이 지금도 남아 있지만, 서울에서 대전까지 거리는 159.8㎞로 청량리~강릉 간 거리(207.3㎞) 비해 훨신 짧다.
강릉선에 투입하는 열차의 재원을 고려했을 때도 무정차 운행에 나설 이유가 별로 없다는 지적이다. 강릉선에 투입하는 ‘KTX-이음’은 6량 1편성의 동력분산식 준고속 열차다. 동력집중식으로 최대 20량씩 끌고 다니는 KTX나 10량씩 달고 다니는 KTX-산천에 비해 잦은 정차에 따른 가감속 부담이 덜하다. 한데 역간 거리가 짧은 국내 실정에 맞춰 개발된 KTX-이음의 도입목적과 어울리지 않게 서울(청량리)~강릉 간을 무정차 운행하는 것이다.
사실 영동고속도로와의 시간경쟁에서 한참 우위에 있는 코레일로서는 KTX를 1~2개역에 더 세운다고 해서 크게 손해볼 것이 없다. 이 같은 까닭에 코레일은 인구 5만명 이하의 군(郡)지역에까지 KTX를 무리하게 정차하는 ‘배짱영업’을 해왔다. 한데 강릉선에서만 전례 없이 태도를 바꾼 것이다.
KTX가 서울에서 강릉까지 무정차 운행하면서 같은 강원권인 원주도 나름 배가 아픈 모양새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향하는 강릉선 KTX 하행선 열차는 서울역에서 출발해 청량리역을 지나 원주 만종역에 정차한 뒤 강릉역으로 향했다. 원주는 강원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터라 강릉선 KTX 모든 열차는 만종역에 정차해 왔다. 강원도에서 영서(嶺西)를 대표하는 원주는 인구 36만명으로, 영동(嶺東)을 대표하는 강릉(21만명)보다 15만명가량 많다. 원주 출신의 한 인사는 “원주 출신 민주당 이광재 전 의원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강원지사에 당선됐더라면 KTX가 원주를 지나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철도계에서는 ‘강릉선 KTX’의 무정차 운행을 놓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전후로 국가철도정책이 인구 21만명의 강릉에 지나치게 휘둘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우선 강릉선 KTX가 시종착역을 서울역으로 하는 것도 유사한 노선과 비교해 특혜라는 지적이다. 강릉선 KTX가 이용하는 서울 시내구간 지상선로는 선로포화가 심각한 상태다. 특히 용산역에서 한강변을 따라 청량리역까지 이어지는 경원선 서울 시내구간은 차단기를 설치한 평면교차로까지 가진 노선으로, 2가닥 선로로 경의중앙선(전철)을 비롯해 강릉선(KTX-이음), 경춘선(ITX-청춘) 등 각급 열차를 처리하는대표적 철도 병목구간이다.
이에 서울 동쪽을 오가는 중앙선(KTX-이음)은 청량리역, 경춘선(ITX-청춘)은 용산역에서 열차를 끊어낸다. 한데 강릉선 KTX는 과거 평창 동계올림픽 때 인천공항에서 서울역을 거쳐 강릉역까지 이어지는 노선으로 계획한 터라, 지금도 서울역을 시종착역으로 삼는다. 가뜩이나 비좁은 서울 시내 지상노선에 강릉선 KTX까지 비집고 들어오면서 정작 2600만 수도권 주민들이 출퇴근용으로 쓰는 경의중앙선은 배차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강릉선 KTX 시종착역이 중앙선과 같은 청량리역으로만 옮겨 가도 서울 시내 선로 이용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것”이란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부터 휘둘려
강릉선 KTX의 시종착역인 ‘강릉역’도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이유로 과도한 사업비가 투입됐다. 강릉역은 지방도시에 있는 KTX역사 중 유일하게 지하에 있는 역이다. 서울 수서역, 경기도 광명역과 같이 선로는 지하에, 역사는 지상에 있는 ‘반(半)지하’ 구조다. 인구 100만명이 넘는 광역시에도 모든 KTX역은 지상에 있다. 인구가 많지 않아 유휴부지를 쉽게 찾을 수 있고, 땅값이 저렴해 수용부담도 덜한 지방도시에서는 공사비용만 갑절로 드는 지하역을 지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데 강릉시는 ‘동계올림픽 보이콧’을 운운하면서 강릉역의 시내 존치와 함께 선로지하화를 요구했다. 반면 KDI(한국개발연구원) 공공투자관리센터에서 2014년 실시한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강릉역과 시내구간 선로 지하화에 따른 ‘비용대비편익(B/C)’은 0.11로 사실상 낙제점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동계올림픽 준비로 마음이 급했던 박근혜 정부는 예타를 무시하고 강릉역의 시내 존치와 함께 강릉 시내구간 선로 지하화를 결정했다. 강릉역 지하화에 따라 추가된 비용은 4600억원에 달한다.
예타를 무시한 강릉역 지하화는 강릉역에서 제진역(강원도 고성군)까지 이어지는 동해북부선을 놓기로 하면서 또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강릉역에서 동해선철도 남북출입사무소가 있는 제진역까지를 연결하는 동해북부선은 지난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으로, 2020년에는 예비타당성 조사마저 면제됐다.
이에 국가철도공단(KR)은 강릉역 아래를 추가로 파서 지하 5층까지 새로 만들기로 한 상태다. KR 측은 “강릉 시내 통과구간은 도심지 통과를 고려해 지하통과로 제안돼 설계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추가 지하화에 따른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하는 수밖에 없다. 강릉역 지하화를 포함해 동해북부선은 총사업비만 2조7400억원으로 추산된다. 철도계의 한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강행한 동해북부선(강릉~제진)은 지금과 같은 남북 관계 상황에서는 그다지 시급하지 않고 실제로 남북 물류 수요가 있을지도 의문”이라며 “동해북부선 강릉 시내 통과구간도 추가적인 지하화 없이 기존 강릉역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