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의 한 지하철 여자 화장실에서 장기간 스토킹과 협박을 당하던 20대 여성이 가해자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해자인 30대 남성은 피해자의 고소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수사 과정에서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경찰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며 적극적으로 신변 보호를 하지 않았다. 스토킹이 흉악 범죄로 이어지는 일이 잇따르고 있는데도 이를 대하는 수사기관이나 법원의 인식이 안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오후 전 서울교통공사 직원 전모씨가 20대 동료 여성 역무원을 뒤쫓아가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서 시민들이 추모 메시지를 쓰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중부경찰서는 15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근무하던 서울교통공사 소속 역무원 A(28)씨를 이 역 여자 화장실에서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서울교통공사 직원 전모(31)씨를 긴급 체포했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구속 여부는 16일 결정된다.

전씨가 입사 동기인 A씨를 살해한 것은 지난 14일 오후 9시쯤이다. 전씨는 신당역 내부에서 1시간 10분간 A씨를 지켜보다가 여자 화장실을 순찰하러 간 그를 따라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A씨는 화장실 비상벨로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듣고 달려온 다른 직원들과 시민들이 현장에서 가해자를 붙잡았다. A씨는 발견 당시 심정지 상태였다.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11시 30분쯤 숨졌다.

112에서 접수한 스토킹 피해 신고

경찰에 따르면 전씨는 A씨와 관련된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고 스토킹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검찰은 지난달 18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전씨에게 징역 9년을 구형했고, 전씨는 지난 15일 1심 선고를 앞두고 있었다. 선고 하루 전날 A씨를 찾아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전씨가 범행 전 1시간 이상 역 안에 머물며 A씨를 지켜봤고, 흉기를 준비한 데다 범행 당시 일회용 샤워캡까지 머리에 썼다는 사실을 감안해 경찰은 ‘계획 살인’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샤워캡을 쓴 건 피가 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신당역으로 갈 때도 본인의 교통카드를 쓰지 않고 일회용 교통카드를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피해자 측 변호인에 따르면, 전씨가 피해자를 스토킹한 것은 약 3년 가까이 된다. 2018년 서울교통공사 입사 당시 A씨와 친분을 쌓았고 이듬해 11월부터 스토킹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300차례가 넘는 전화와 메시지를 남기며 A씨와의 만남을 요구하던 전씨는, 작년 하반기부터 ‘A씨 관련 영상을 유출하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씨는 A씨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소셜미디어 계정을 10개 이상 만들어 피해자에게 연락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경찰 상담을 받고 작년 10월 전씨를 협박 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이 전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할 우려가 없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그는 스토킹을 멈추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A씨는 지난 1월 전씨를 또 고소해야 했다.

스토킹에 시달리던 20대 여성이 지난 14일 가해자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서울 한 지하철역 여자 화장실의 모습. 15일 오후 한 시민이 이 화장실 앞 탁자 위에 꽃을 올려놓으며 숨진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화장실 입구에는‘여성이 행복한 서울, 여행(女幸) 화장실’이라는 인증 마크가 붙어 있다. /장련성 기자

스토킹과 협박이 흉악 범죄로 이어지는 사건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작년 11월에는 서울 중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전 남자 친구에게 스토킹을 당하던 30대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 지난 2월에는 서울 구로구에서 스토킹으로 신변 보호를 받던 40대 여성이 전 남자 친구가 휘두른 흉기에 숨졌고, 지난 6월에도 경기 안산에서 신변 보호를 받던 40대 여성이 60대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스토킹 관련 112 신고 건수는 2020년 4515건에서 2021년 1만4509건으로 늘었다. 올해 1~7월에도 1만6571건으로 이미 지난해 전체 신고 건수를 뛰어넘었다.

하지만 법원이나 수사기관 등의 피해자 보호 조치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A씨는 작년 10월 고소 뒤에 1개월간 ‘범죄피해자 안전조치(신변보호)’ 대상자로 분류돼 1개월간 보호 조치를 받았다. 이마저도 “본인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한 달 만에 끝났다. 1월 추가 고소를 한 뒤에도 별도의 보호 조치는 없었다. 경찰은 피해자 의사와 무관하게 직권으로 100m 이내 접근 금지 등 응급 조치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토킹 기간이 3년 가까이 되는데도 안이하게 대처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경찰 관계자는 “추가 고소가 들어왔지만 가해자 접근을 제한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고 해명했다.

두 사람의 직장인 서울교통공사의 대처도 논란이다. 가해자 전씨는 회사 내부망을 통해 A씨가 근무하는 역과 근무 시간대를 확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전씨가 경찰에서 수사를 받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울교통공사는 그를 직위 해제했지만 내부망 접속은 차단하지 않은 것이다. 피해자가 혼자서 순찰을 돌았던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교통공사 관계자는 “1심 판결이 나오지 않고 직위해제만 된 상태에서 내부망 접속을 막을 수는 없다”면서 “야근 근무 때 직원 안전을 챙길 방법을 마련하겠다”고 해명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피해자 근무지나 주거지, 가해자 전과 등을 종합해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되면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보호 조치를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법무부도 스토킹 범죄 전과자들에게도 재범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면 전자 발찌를 채우는 법률 개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관계 부처에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하는 범죄에 효과적이고 단호한 대응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