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하나은행 초청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대한민국과 우루과이의 경기에 출전한 김민재./뉴시스

한국과 우루과이의 친선전을 1시간 앞둔 28일 오후 7시, 대한축구협회는 징계로 제명된 전현직 선수와 지도자 등 100명을 기습 사면했다. 사면된 명단에는 조직폭력배와 결탁해 승부를 조작하는 등 심각한 물의를 빚은 선수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고선 경기가 끝난 직후 수비수 김민재가 폭탄 발언을 했다. 인터뷰 도중 느닷없이 국가대표 은퇴 얘기를 꺼냈다. 축구계에서는 이를 두고 ‘뉴스는 뉴스로 덮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번지고 있다.

◇27세 전성기 맞이하는 세계적 수비수가 갑자기 은퇴 시사..?

우루과이와의 친선경기 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온 시선이 집중됐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의 무승부에 이은 리턴 매치에서 1대 2로 패해서가 아니었다. 이태리 리그 나폴리에서 뛰는 27세 수비수 김민재의 국가대표 은퇴 시사 발언 때문이었다.

경기를 마친 김민재는 경기 소감을 묻는 취재진과의 질의응답 도중 “힘들어 보인다”는 질문에 “그냥 지금 힘들다. 멘탈적으로 무너져있는 상태다. 당분간이 아니라 소속팀에서만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축구계에서 ‘소속팀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은 국가대표를 은퇴와 함께 가는 문장으로 여겨진다.

“이적설 때문인가”라는 기자의 추가 질문에 김민재는 “아니다. 축구적으로 힘들고, 몸도 힘들다. 대표팀보다는 소속팀에 신경 쓰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축협과) 이야기는 나누고 있었는데 조율됐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다”고 말하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김민재는 유럽에서 가장 주목 받는 수비수다. 이번 시즌 그를 품은 이태리 리그 나폴리는 ‘철기둥’ 김민재의 활약 덕분에 유럽 5대 리그에서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며,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을 때 차지했던 리그 우승컵을 33년 만에 되찾아오기 직전이다. 전성기를 향해 가는 어린 그가 은퇴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으니 축구계가 발칵 뒤집힌 것이었다.

대한축구협회가 28일 승부조작을 한 축구인 포함 총 100명을 전격 사면했다. /대한축구협회

◇뉴스는 뉴스로 덮는다? 축협을 향한 음모론 나오는 이유는

이후 ‘김민재가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에 대한 해석이 나와야 했지만 불길이 향한 곳은 축협이었다. ‘김민재의 은퇴 시사 발언이 되레 축협의 큰 그림 아니었냐’는 음모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축협은 우루과이전을 1시간 앞두고 경기가 열린 서울 마포구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승부조작 축구인 등 100명의 사면을 기습 의결했다. 축협은 “지난해 달성한 월드컵 10회 연속 진출과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을 자축하고, 축구계의 화합과 새 출발을 위해 사면을 건의한 일선 현장의 의견을 반영했다”며 “오랜 기간 자숙하며 충분히 반성했다고 판단되는 축구인들에게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취지도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사면된 100명 가운데 2011년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된 축구인들도 포함됐다고 알려졌다는 점이다. 당시 검찰은 거액의 배당금을 노리고 접근해 온 조직폭력배와 전주(錢主)들에 협조해 승부를 조작했던 전·현직 선수를 기소한 바 있다. 당시 현역 선수만 9개 구단 53명이었고, 이는 외국인을 제외한 국내 프로리그 등록선수 621명 가운데 8.5%에 달하는 규모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축구계에서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뉴스는 뉴스로 덮는다’는 걸 축협이 몸소 실천한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온 것이다. 김민재의 은퇴설이 그만큼 파괴력 큰 뉴스이기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왔지만, 축협을 향한 비난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승부조작범이 돌아온다고? 정치권까지 부글부글

사면이 되면 이들은 다시 축구계로 돌아와 정식 지도자나 행정가가 될 수 있다. 스포츠의 근간을 무너뜨린 이들을 다시 축구계로 불러들이는 축협의 행태에 정치권까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사면 이튿날인 29일 “축협은 대한민국 축구계를 박살 낼 뻔한 주범자를 용서해 성과를 나눠 갖자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런 주장에 납득하시나?”라며 “이제부터 승부조작은 ‘안 걸리면 장땡, 걸려도 10년만 버티면 사면’이라는 공식이 갖춰졌다. 축협의 이 결정은 아주 나쁜 선례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축협이 이들 사면을 밀실에서 진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한 축협 임원은 “이사회 전까지 난 승부조작 사면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그런 걸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데 성급했던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또 다른 임원은 “축협 산하 공정위원회가 전담한 것이라 이사회 전까지 나 역시 이들의 사면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축협 측은 “축협이 큰 그림을 그렸더라도 김민재는 그런 것에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라며 “축협의 큰 그림설은 우스갯소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사회에서 강한 반대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평생 축구만 해온 사람들이 10년 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상황을 좀 이해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축협 산하 공정위원회 수장이 검사 출신 변호사인데,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진 것”이라며 “승부조작에 대한 사면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란 정치권의 반응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축구계의 승부조작이 처음 있는 일이니 이번 사면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김민재는 축협을 향한 비난이 절정에 달하던 29일 오후 4시쯤 은퇴 시사 발언이 ‘단순 실수’였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그는 ”힘들다는 의미가 잘못 전달돼 글을 올린다”며 “힘들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대표선수로서 신중하지 못한 점, 성숙하지 못한 점, 실망했을 팬·선수분들께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