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미추홀구 나홀로 아파트 전세 사기’의 피해 현장인 인천 숭의동 H 아파트는 19일 오후 적막했다. 이 아파트는 일대 주택 2700채를 실소유한 건축업자, 이른바 ‘건축왕’ 남모(61) 씨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곳이다. 주민들은 아파트 세입자의 98%가 전세사기 피해자인 것으로 추정한다.
아파트를 마주보고 서자, 주민들이 걸어놓은 현수막 펄럭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입찰시 내부박살, 공사비 각오하라’ ‘사회적 재난 현장에서 경매 장사하는 당신도 가해자’ 등의 문구가 적힌 빨간 현수막이었다.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쫓겨나기 전에 아파트 내부를 못 쓰게 망가뜨려 놓겠다는, ‘너죽고 나죽자‘의 절규였다.
아파트 1층 분양 사무소는 폐허같았다. 입구엔 몇 달 전 도착한 등기우편도착 안내문이 먼지를 덮어쓴채 여전히 붙어있었다.
주차장 한쪽 구석 야외 테이블에선 남자 셋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세 입주민 이정희(36) 씨, 김윤근(51) 씨, 이택노(75) 씨였다.
현수막 얘기를 꺼내자 주민들은 “우리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라며 “이 집에 내 인생과 애들 미래까지 걸렸다”고 했다.
현수막은 어떻게든 경매참여를 막아 보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경매참여자는 오히려 더 늘었다고 한다. 입주민에 따르면, 지난달초 H아파트 맞은편 전세사기 피해 물건 경매에선 3~4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지난주 H아파트 물건에는 6~10명정도 입찰에 참여하고 있다.
경매 참가자가 늘면서 낙찰가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 경매 전문가는 “인천 미추홀구 빌라 낙찰가는 지난달만해도 감정가의 60% 정도였는데, 최근들어 70%까지 올라갔다”고 말했다.
피해자 이정희씨는 “돈 냄새가 나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겠느냐”며 “싼 값에 낙찰 받아서 수리해서 팔면 최소한 2000만~3000만원은 남는 장사인데, 여유가 있는 사람들한테는 당연히 돈 벌 기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시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와 관련해 속칭 ‘건축왕’, ‘빌라왕’ 등이 소유한 주택은 총 3008가구로 파악된다. 이 중 2523가구가 미추홀구에 있으며, 지난달 기준으로 2479가구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피해가 확인된 주택 중 1523가구가 이미 경매에 넘겨졌다.
미추홀구는 인천의 대표적인 구도심으로 다른 지역보다 부동산 가격이 낮은데다 숭인동 집값은 상대적으로 더 싸 ‘무자본 갭투자’ 피해가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입주민 98% 전세사기 피해…초상집이나 마찬가지
H 아파트 주민들은 작년 5월 받은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은행 직원들이 찾아와 “집이 경매로 넘어갈 것”이란 통보와 함께 세입자 관련 사항을 조사해갔다. 두 달이 지나자 법원의 경매 통지서가 줄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아파트 입주민회가 나서서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를 꾸린 것도 이 무렵이다.
느닷없는 경매 통지는 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김윤근 씨는 지방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한 달 전 일을 그만뒀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 대출을 갚기 위해 이라크로 갈 생각이다. 오는 5월 20일은 김씨가 빌린 전세대출 6800만원의 만기일, 그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김씨는 “이라크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면 월 1000만원은 받을 수 있고, 거기서 두집살림 생활비를 제외해도 최소 월 500만원을 모을 수 있다”며 “어떻게든 돈을 모아 대출 원금과 불어난 이자를 하루 빨리 털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 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 집이 경매 낙찰이 되면, 등기이전, 잔금 등 절차를 거치더라도 4개월밖엔 못 버틴다”며 “그 상황에서 내가 해외로 일하러 나가면 외국인 아내와 초등학교 2학년 아이는 정부가 지원해준 적은 전세대출금으로 더 열악한 주거지로 이사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계약한 지 딱 2개월 만에 날벼락을 맞은 이택노 씨는 오히려 초연한 얼굴이었다. 지난해 초 상처(喪妻)한 이 씨는 지난해 6월 8000만원 전세 계약을 하고 홀로 이 아파트에 들어왔다. 당시 등기부등본상 근저당권이 1억3000만원이었는데 부동산은 현재 시세가 2억1000만원 정도니까 괜찮다며 이 씨를 안심시켰다.
이 씨는 “계약한 지 딱 2개월만에 은행 직원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 집이 곧 경매가 들어갈 것’이라더라. 그때 내 심정은 말로는 표현 못한다”고 했다.
◇피해자들 ”경매 중단, 우선낙찰권 달라”
주민들은 정부가 제시한 ‘전세 피해 임차인 저리 대출’만으로는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책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전세 갭투자 수법과 똑같이 전문 경매자들의 제2의 갭투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정희 씨는 “얼마 전 한 경매자가 물건 낙찰 후 현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조금만 올려 그대로 살라고 제안했다더라”며 “이렇게 되면 경매자가 낙찰액과 전세금 차익만 쥐고도 경매 물건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전세사기 피해가 커진 원인이다. 이 사태가 되풀이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주민들이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은 ‘경매 저지’. 피해 주택에 대한 경매를 중단하고 우선낙찰권을 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보증금이 묶여있는 상황에서 최소한 세입자가 내 집을 낙찰 받을 수 있도록 우선권을 주고 저리로 금융 지원을 해주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해 피해 주택 경매 중단 절차에 착수, 전세사기 피해 주택에 대해 금융회사 대출을 해준 경우 6개월 이상 경매에 넘어가지 않도록 협조를 구하고 있다.
금융기관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부실채권을 넘긴 경우에는 정부의 경매 유예 등의 조치가 가능하지만, 채권자가 개인 혹은 부실채권(NPL) 매입기관 등 민간인 경우 경매·매각 유예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어 경매 낙찰을 막을 수 없다. 19일에도 인천에선 피해 주택 11채의 경매가 예정대로 이뤄져 1건이 낙찰됐다.
이에 정부는 근본 대책으로 임차인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윤 대통령이 적극 검토를 지시했다”며 “과거 부도임대주택에 대해 우선매수권이 운영된 적이 있다. 운영 실적이 많지는 않지만 위헌에 걸리지 않아 제안은 해 놓은 상태”라고 했다.
당정은 20일 전세 사기 피해 임차인에게 주택 경매 때 우선매수권을 주고, 피해 임차인이 거주 주택 낙찰 시 구입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저리대출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