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1543년, 세계사 속에서 조선을 바라본다.
인류 역사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은 지성(知性)이다. 한 공동체가 소유한 지성은 외부 공동체와 교류를 통해 규모가 커지고 질적으로 진화한다. 교류 없는 지성은 없다.
서기 1543년 유럽과 조선과 일본에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유럽에서는 그해 3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발표로 인간 탐험시대가 시작됐다. 그해 9월 일본은 가고시마번에 있는 작은 섬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으로부터 조총 2자루를 구입해 ‘칼의 시대’에서 ‘총의 시대’로 전환했다. 이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보다 100년 전 시작된 ‘대항해시대’ 물결을 타고 극동에 도착한 사람들이다. 총의 전래는 이후 상업적인 교류로 확대됐다. 조선에서는 풍기군수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 본격적인 성리학 문치(文治) 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명나라는 조선에 은과 금을 조공으로 요구했다. 조선은 은광 폐쇄로 조공요구에 대처했다. 1503년 연산군 때 평민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 획기적인 은 제련법을 발명했다. 정부에는 보고를 받는 데 그쳤다. 그런데 1533년 일본은 이 은 제련법을 수입해 당시 매장량이 세계 2위인 이와미 은광 개발에 사용했다. 일본은 그 은으로 유럽제 조총을 개량하고 대량 생산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일본으로 간 조선 도공이 일본 요업 산업을 일으켰다. 300년 뒤 이들이 일궈낸 기술과 자본이 일본 근대화 메이지유신의 토대가 됐다. 19세기 말 파리에서 열린 세계무역박람회에서 조선 도공 후손 심수관 회사가 만든 도자기가 선풍을 일으켰다.
조선은 18세기 이후 학문의 자유를 ‘사문난적’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했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첨단 학문을 수용했다. 이를 ‘난학’이라 한다. 일본 의사들은 ‘중국사람과 일본사람이 몸 구조가 다른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읽고 해부를 한 결과 모든 것이 잘못됐음을 알게 됐다. 학문의 자유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인 지침이었다. 이게 바로 1543년 유럽제 소총을 수입한 이래 유럽 지성과의 교류가 누적된 결과다.
고종과 천황 메이지는 1852년 동갑내기에 군주 등극 시기도 비슷했던 두 군주였다. 조선에게는 불행하게도, 간 길은 달랐다. 그때까지 축적된 권력층의 세계관과 지성의 누적 정도 차이가 컸다. 일본 지식층과 권력층은 그때까지 쌓아놓은 자본과 군사력과 유럽에서 수입해 토착화한 학문으로 근대화를 준비했다. 메이지유신이다. 메이지유신에 경제적으로 기반이 된 산업은 조선 도공을 끌고 와 토착화시킨 요업산업이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누적된 역량을 근대화에 집중해 메이지유신에 성공했다. 조선은 조총을 버리고, 은을 버리고 성리학을 받아들였고 이후 역사 진행 과정에서 여러 발전 기회를 상실하고 근대화에 뒤처져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방당하고, 침략 당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그 조선과 결별하고 찬란한 문명국가를 만들었다. 어찌보면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500년의 기적이다. 그 조선 500년은 무엇이 잘못됐고, 세계사적 맥락에서 무엇이 결여돼 있었을까. 듣기 싫고 보기 싫은, 하지만 미래를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지성사에 대한 반성을 위해, 운명의 1543년으로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