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전 11시 서울 관악구 신사동의 다세대주택 반지하층. 이곳에서는 작년 8월 집중호우로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일가족 3명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서울시와 관악구는 이런 반지하층의 창문 앞에 ‘물막이판’을 설치해 침수를 막겠다고 했지만, 인근 건물 13곳 중 물막이판이 설치된 건물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물막이판이 없으면 빗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배수구 역할을 하는 ‘빗물받이’가 정비돼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건물들이 있는 골목길 200m 구간에 빗물받이 40개가 설치돼 있지만 이 가운데 27개(67.5%)는 사실상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낙엽과 꽃잎, 담배꽁초와 종이컵, 박스 등 각종 쓰레기와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인근 주민 김모(62)씨는 “작년 수해 때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왔다 간 이후에도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며 “이번 여름에도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는데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서울 강남역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근처 500m 도로에 빗물받이 50개가 있는데, 23개가 쓰레기로 막혀 있었다. 한 빗물받이는 담배꽁초 80여 개와 나뭇잎, 뭉친 휴지, 다 쓴 라이터, 껌 포장지 등으로 꽉 차 있는 상태였다. 또 신발 매트, 고무판 등으로 윗부분이 덮여 있어 아예 배수가 안 되는 빗물받이도 10개나 됐다.
이곳을 지나던 정모(49)씨는 “작년 폭우로 강남역 일대가 물에 잠겨 막힌 배수구를 뚫는 의인이 화제가 됐었다”며 “올해도 의인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서초구 주민 김모(67)씨도 “빗물 터널도 지어지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는데 하수도는 여전히 쓰레기로 막혀 있다”며 “올해도 비가 많이 온다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작년 8월 서울에서는 강남권을 중심으로 시간당 100㎜가 넘는 폭우로 8명이 사망하고, 도로와 주택, 상가, 차량 등이 물에 잠겼다. 당시 서울시는 상습 침수 지역 6곳(강남역·광화문·도림천·용산·동작·강동)에 대심도 빗물터널 3곳을 짓기로 했지만, 1년이 다 돼가는 이달 중 설계·시공에 대한 입찰이 진행될 예정이다. 빗물터널은 지하 40~50m 구간에 설치되며, 호우 시 빗물을 보관했다가 외부 상황이 정리되면 하천으로 빗물을 방류하는 대형 터널이다.
이렇다 보니 스스로 폭우에 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고주창(70)씨는 “작년에도 하수구에 낙엽 같은 것이 잔뜩 쌓여 있어 배수가 잘 안 돼 물난리가 컸다”며 “곧 장마가 올 텐데 아직도 청소가 제대로 안 돼 가게에 차수판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 각 자치구는 빗물받이를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전담 인력을 두고 있지만, 청소하는 횟수가 너무 적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관악구는 연 1회, 강남구는 연 2회만 빗물받이 청소를 하고 있다고 한다. 쓰레기가 쌓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빗물받이 위에 촘촘한 덮개를 설치해 쓰레기가 안으로 쌓이지 않도록 할 수는 있지만, 비가 왔을 때 떠내려온 쓰레기가 이 촘촘한 망에 걸리면서 배수를 막을 수도 있어 전면적으로 덮개를 설치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도시 침수 주요 발생 원인은 낙엽이나 쓰레기, 토사 등으로 막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하수 관개 시설”이라며 “본격적으로 장마가 오는 6월 중순 이전에 하수구 정비 작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서울시는 반지하에 침수가 시작되면 주민, 통반장 등이 출동해 대피를 돕는 ‘동행 파트너’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폭우가 쏟아지면 순식간에 물이 들어차기 때문에 대피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야간에 발생하는 경우에는 특히 신속한 대피가 어렵다”며 “결국은 침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책을 세우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