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연대(정의연) 등 여성단체 회원 50여 명이 4일 아침 서울 중구 예장동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 ‘기억의 터’ 안에 있는 임옥상씨의 작품 ‘대지의 눈’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이들은 성추행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임씨 작품에 보라색 천을 씌우고 서울시의 철거 시도를 저지했다. 정의연 측은 “보라색은 평화의 상징으로 (이곳에) 어떤 공권력도 들어오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4일 오전 6시쯤 서울시 중구 예장동 일본군 위안부 추모 공원 ‘기억의 터’. 서울시가 포클레인을 동원해 공원에 있는 ‘민중미술가’ 임옥상(73)씨의 작품을 철거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지난달 임씨가 여직원 성추행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자 서울시가 철거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 시각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 여성 단체 회원 50여 명이 철거 작업을 막아섰다. 이들은 보라색 천으로 나무와 나무를 감아 공원 외곽을 빙 둘러쌌다. 정의연 측은 “보라색은 평화의 상징으로 (이곳에) 어떤 공권력도 들어오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기억의 터 기습 철거 중단하라’ ‘위안부 지우기 중단하라’ 등을 적은 피켓을 들고 늘어섰고, 공원 내 임씨의 작품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 조형물을 보라색 천으로 덮었다. 한경희 정의연 사무총장은 “임옥상씨의 성추행에 분노한다”면서도 “서울시가 임옥상씨를 핑계로 위안부 역사를 지우려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했다.

‘기억의 터’는 박원순 전 시장 시절인 2016년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고자 만들었다. 설립 추진 위원회가 시민 2만여 명의 성금을 모아 옛 일제 통감 관저 터에 조성했다. 임씨가 공원을 기획했고, 자기 작품 2점을 설치한 것이다. 지난 7월 임씨가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혐의를 시인하고 사과까지 하자 일각에선 “성추행 혐의를 받는 임씨의 작품이 성 착취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는 공간에 있는 게 말이 되느냐”는 말이 나왔다.

정의기억연대 등 여성 단체 회원들이 4일 아침 서울 중구 위안부 추모 공원 ‘기억의 터’로 들어가려는 모습. 이날 서울시의 임옥상씨 작품 철거를 저지하기 위해 모였다. 뒤로 보이는 공간이 임씨가 만든 작품 ‘대지의 눈’이다. /이태경 기자

이날 임옥상 작품 철거 반대 시위에는 여성 단체와 개인 등 1530여 명이 연대 서명으로 동참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등 대표적 여성 단체들이 포함됐다. 집회 현장인 ‘기억의 터’에는 정의연과 추진위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 주장은 “임옥상의 성추행은 규탄하지만, 임씨 작품은 철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장을 지낸 최영희 전 민주당 의원은 “임옥상씨가 돈 상관없이 작품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임씨가 그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며 “우리도 날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임옥상 지우기는 동의하지만 대안 없는 철거는 반대한다”고 했다.

한경희 정의연 사무총장은 “서울시가 성폭력 근절 대책을 먼저 세워야 한다. ‘기억의 터’ 철거는 성폭력 저항의 역사를 지우려는 서울시의 기만적 행태”라면서 “임옥상을 핑계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까지 통째로 지우려는 서울시를 규탄한다”고 했다.

서울시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성추행 선고를 받은 임옥상씨 작품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뿐 아니라 시민들 정서에도 반하는 행동”이라며 “편향적 여론 몰이를 중단해달라”고 했다.

여성 단체 회원들은 이날 2시간 30분가량 집회를 연 뒤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10여 명이 임씨 작품 ‘대지의 눈’ 위에 앉아 늦은 밤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일단 철수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기억의 터’를 철거하는 게 아니라 임씨 작품만 철거하는 것”이라며 “빠른 시일 내에 철거를 마칠 것”이라고 했다. 철거 후엔 추진위원회와 협의해 새 작품을 설치할 계획이다.

‘임옥상의 성추행 사건’ 자체를 ‘기억의 터’에 남겨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여성 단체 한 관계자는 이날 “임옥상의 성추행 역사도 여성 폭력의 역사”라며 “’기억의 터’를 철거하는 것은 그런 여성 폭력의 역사를 지우는 것”이라고 했다.

임옥상 작품 철거에 반대하는 여성 단체들을 두고 “상대에 따라 다른 잣대로 선택적 대응을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정의연의 기부금 유용 의혹이 불거졌던 2020년 정의연을 공개 지지했다. 이들은 당시 “일부 회계 미숙일 뿐”이라며 “위안부 운동을 분열시키고 훼손시키려 한다”고 했다. 같은 해 오거돈 부산시장의 강제추행 사건 때는 침묵하다가 뒤늦게 입장을 냈는데, “가해자를 처벌하라”면서도 “정치적 이용을 중단하라”고 했다.

여성연합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실을 유출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피해자 변호인이 여성연합 측에 박 전 시장을 ‘미투(Me too)’로 고소할 것이라고 대략적으로 알렸는데, 그 사실이 김영순 당시 여성연합 대표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거쳐 박 전 시장에게 전달됐다는 내용이었다. 이 부분은 검찰이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렵다”면서 불기소 처분했다.

여성연합 대표 출신인 남 의원은 당시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부르자고 주장해 비판을 받았다. 여성연합은 “피해자의 용기를 응원하며 그 길에 함께하겠다”고 짧은 논평을 낸 뒤 침묵하다 1년쯤 지나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유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드렸다”며 사과했다.

두 단체는 2018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이윤택 연출가의 극단원 상습 추행이 논란이 됐을 때, 2020년 김남국 당시 민주당 의원이 팟캐스트에 출연해 성적 언어를 사용해 논란이 됐을 때도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입장을 냈다.

반면, 여성연합은 2019년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을 향해 ‘달창’이라고 발언했다가 사과한 데 대해 “여혐 표현” “구태”라며 사퇴를 요구했다. 2017년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 자서전의 ‘돼지 발정제’ 내용이 논란이 됐을 때는 “즉각 사퇴하라”는 성명을 내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한 시민 단체 관계자는 “일부 여성 단체들이 자기편은 봐주고 상대편은 공격하는 진영 논리에 따라 움직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