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제의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의 한 협력 업체(하청)에서 일하는 용접공 박석규(53·가명)씨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조선소에서 보냈다. 부산에서 상고를 나온 그는 대한민국 조선 산업이 한창 가파르게 성장하던 1989년 용접일을 처음 배웠다. 상고 출신 상당수가 조선소로 가던 고3 여름쯤이었다. ‘행님’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일을 배우면 하루 1만원을 받았다. 당시 희귀했던 비디오테이프 여러개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조선소에서 일하면 모두 한 식구라고 생각했던 때다. 어디 소속이냐보다 내 기술이 훌륭한지만 따지면 됐었다.
박씨와 세 살 차이인 이길영(56·가명)씨도 지난 30년간 비슷한 용접공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 모두 모두 조선소에서 A급 용접 기술을 가진 베테랑으로 꼽힌다. 일하는 시간도 요즘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평균 9시간으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씨는 한화오션 정규직 직원이다. 인문계 고교를 졸업하고 대우조선 직업훈련소를 거쳐 용접공이 됐다.
경력도 기술도 비슷하지만 하청 용접공 박씨는 세전 연봉이 4500만원, 원청 용접공 이씨는 8700만원이다. 대기업만 제공하는 각종 복지 혜택을 합하면 이씨의 실질소득이 박씨의 2배 이상이다. 조선업 원·하청 격차가 두 사람의 현재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지난달 21일 거제 조선소 인근에서 만난 두 사람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원청이든 하청이든 용접 기술이 비슷하면 임금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했다. 박씨는 “원청에서 일하는 게 더 안정적이긴 했지만 기술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하청을 골라가면 되니까 굳이 원청에 들어가려 하지 않아도 됐다”고 했다.
임금 격차는 1997년 IMF 외환 위기 때부터 시작됐다. 조선 대기업 직원들의 임금은 호봉제가 지켜줬지만, 협력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원청이 주던 공사비(기성금)가 크게 줄면서 하청 직원들 임금이 요동쳤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나, 최근의 조선업 불황 때도 비슷했다. 이런 일들이 겹치면서 조선업 하청 근로자의 임금은 원청 근로자의 50∼70% 수준(2022년 정부 실태조사)에 머물게 됐다. 박씨는 “나라 경제나 조선업에 무슨 위기가 왔다고 할 때마다 내 월급만 떨어졌다”며 “산업이 좋고 나쁠 때가 있지만 하청만 늘 가장 큰 고통을 겪는 게 옳은 건지 의문”이라고 했다.
대기업 직원들이 차곡차곡 늘려온 복지도 원·하청 격차를 더 뚜렷하게 한다. 박씨도 지난 1월 또 한 번 이를 실감했다. 왼쪽 팔꿈치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3주간 입원했는데 일을 못 해 수입이 끊긴 것이다. 박씨는 “원청 직원이었으면 병가 등으로 임금 일부를 보전받을 수 있는 데다 의료비 지원도 있었을 텐데, 하청 직원은 지원은커녕 당장 먹고살 걱정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원·하청 격차는 근로자들이 조선소를 떠나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박씨는 “조선업이 한창 어려웠던 7~8년 전에는 거제 곳곳에 ‘캐나다 6개월’이라고 적힌 포스터들이 많이 붙어 있었다”며 “우리나라 조선소는 일이 없는 데다 해외에선 돈을 몇 천씩 얹어주니까, 그때는 실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일본, 호주, 캐나다 등 각국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이때 해외로 나가 돌아오지 않은 용접공도 많다.
권순원 숙명여자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원장은 “대기업과 달리 협력사는 노동 조건이 악화하면서 사람이 오질 않고, 빈 자리를 채우려 외국인 노동자나 미숙련공을 들여오니 생산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씨는 자기가 제일 잘하는 용접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생각이다. 조선소 용접공으로서 가진 꿈도 있다.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만든다는 항공모함이나 초호화 여객선을 용접해 보는 것이다. 박씨는 “어릴 때 조선소에서 일한다는 건 이런 배를 만드는 일인 줄 알았다”면서 “어차피 용접공이 된 거 죽기 전에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