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온천을 대표하는 109년 역사의 유성호텔이 오는 31일 영업을 종료한다. 유서 깊은 향토 호텔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지역민들은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유성구에 따르면 유성온천의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국여지승람에 1394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해 계룡산 신도안으로 가던 중 유성온천에서 목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종 이방원이 왕자이던 시절, 유성온천에서 목욕한 뒤 병사들이 군사훈련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로 인해 유성온천은 ‘임금이 쉬어가던 곳’으로 불렸다.
지금의 유성온천 모습을 갖추게 된 건 일제강점기다. 1910년대 대전의 발전과 함께 온천 개발이 이뤄졌다. 유성에 정착한 스즈키라는 일본인은 봉명동 유성천 남쪽에 있는 온천탕 부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12년 ‘공주 갑부’ 김갑순이 이 땅을 사들여 개발한 후 이듬해 12월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1970년대 신혼여행지로 사랑받았던 유성온천은 1994년 ‘온천관광특구’로 지정된 후 특수를 누렸다. 당시 관광특구로 지정되면 밤 12시까지만 영업할 수 있던 유흥 업소의 영업시간 제한이 해제되는 혜택을 받았다. 한 해 1000만명이 찾을 정도로 문전성시였다.
유성온천에서 가장 유명한 숙박시설을 꼽으라면 단연 ‘유성호텔’이었다. 1915년 문을 연 이곳을 방문한 거물급 정치인은 여럿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대전을 방문할 때마다 유성호텔에 머물렀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휴가 때 유성호텔에 머물며 정국을 구상하기도 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자신이 직접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살린 것으로 전해진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대전 지역 선수촌으로 지정되어 국제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유성호텔의 위기는 최근 급격히 찾아왔다. 유성온천은 대규모 워터파크 시설이 없음에도 2019년까지 전국 온천 이용순위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온천을 이용하는 이들 자체가 줄어든 데다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경영난을 맞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보면, 유성호텔은 코로나 확산 첫해인 2020년 적자 전환한 뒤 2021년까지 누적 적자가 37억원에 이르렀다. 결국 2022년 10월 호텔 자산을 담보로 수백억 원을 빌린 뒤 호텔은 폐업하기로 결정했다.
유성호텔은 얼마 남지 않은 영업을 앞두고 ‘추억 마케팅’에 공을 들이고 있다. 유성호텔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숙박객들이 직접 남긴 메모가 소개되어 있다. “대전 유성호텔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니 너무 아쉽다. 그동안 힐링 장소가 되어줬던 유성호텔 감사했습니다” “대전의 대표적인 온천수 호텔 잊지 않을게요” 등 아쉬움이 담겨 있다. 한 투숙객은 “60년대 부모와 오던 유성온천, 70년대 친구들과 왔고 80년대 결혼식 하던 곳. 90년대 세미나, 지금은 등산 스틱과 같이 오는 곳”이라며 “아쉽고 슬프네”라고 썼다.
호텔은 투숙객들의 기억에 남을 이벤트도 진행 중이다. 호텔 공식 홈페이지에서 숙박 예약을 하면 체크인할 때 100년 전 유성호텔의 모습이 그려진 플라스틱 목욕 바가지를 준다. 객실 냉장고에는 어린 시절 목욕 후 즐겨 먹던 바나나맛 우유와 초코파이가 채워져 있다. 대전 유성구에 사는 권모(30대)씨는 “주말이면 가족과 나들이 겸 목욕하러 가던 곳이 유성호텔이었다”며 “세련되고 화려하진 않지만, 호텔에서 묵으면서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폐업 뒤 유성호텔 자리에는 새로운 호텔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유성호텔 측은 지난 2월 ‘호텔 터에 2028년 10월까지 24층 건물을 지어 관광호텔업을 하겠다’며 사업 승인 신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