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모녀를 흉기로 살해하고 도주한 60대 남성이 13시간만에 경찰에 붙잡힌 가운데, 피해자가 운영하는 사무실이 있던 오피스텔 건물에는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나타내주는 흔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31일 오전 10시쯤 본지가 찾은 ‘강남 오피스텔 모녀 살인 사건’ 현장인 선릉역 인근 오피스텔에는 피해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들이 남아있었다. 이 건물 관리인에 따르면 모친이 운영하던 사무실은 6층에 위치해 있지만, 6층에서 발생한 범행의 흔적들은 밤 사이 모두 지워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건물 4층과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에는 수십개의 혈흔이 남아있었다. 먼저 4층 엘리베이터 옆 벽면에는 10여개의 핏자국이 튄 흔적이 보였다. 이 엘리베이터 앞 바닥에서 약 3m 떨어진 비상 계단까지는 작은 점 형태로 피가 떨어져 굳은 형태의 자국 수십개가 이어져 있었다. 피의자 박모(65)씨가 모녀를 공격하자 피해자들이 이를 피해 급히 달아난 흔적으로 보였다.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에는 성인 손바닥 만한 크기의 핏자국 여러개와 가로 50cm 정도 크기의 대형 혈흔도 발견됐다. 박씨에게 공격당한 피해자들이 이곳으로 피신한 것이라면, 이미 상당한 출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거즈 등 붕대가 널브러진 흔적으로 보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들의 응급처치도 이곳에서 이뤄졌을 수 있다.
사건이 발생한 현장은 공인중개사, 법무사, 소규모 회사 등의 사무실과 거주 목적으로 입주한 사람들이 섞여 있는 건물이다. 보통 3~6개월 단기로 입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31일 본지와 만난 사무실 직원들은 “오후 6시 이전에 이미 퇴근해 사건이 발생한 날 저녁엔 건물에 없었다”고 했다.
경찰이 출동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인근 상인 A씨는 “여성 2명이 들것에 실려가며 밝은 색 상의를 풀어헤친 채 구급대원들로부터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더라”며 “전신에서 주목할 만한 핏자국은 목격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핏자국도 없고 멀쩡했다”며 “살인사건인 줄은 전혀 몰랐고, 작은 사고가 났나 싶었다”고 했다.
한편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 30일 오후 6시 54분쯤 강남구 선릉역 인근 오피스텔에서 60대 여성과 그 딸에게 흉기를 휘둘러 죽인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추적 끝에 31일 오전 7시 45분쯤 서초구 남태령역 인근 노상에서 박씨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살해 현장과 검거 지점은 직선 거리로 7km 떨어져 있다. 박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택시를 수차례 갈아타는 등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도 파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