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비상 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국 상황은 설 또한 두 갈래로 갈라 놓았다. 조부모와 친척들이 모여 정치 얘기가 안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귀성길을 포기하는 MZ(20·30)세대까지 나왔다.
온라인 조사업체 피앰아이가 올해 20~69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설 연휴에 대한 여론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41.6%가 “집에서 쉴 예정”이라고 답했다. 고향(본가) 방문 예정은 35.3%에 불과했다. 특히 20대는 설 연휴 기간 “여행을 가겠다”는 비율이, 30대는 “연휴 기간에도 출근하거나 업무를 할 예정”이라고 답한 비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와, 본지가 실제로 들어본 MZ세대들의 목소리도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구가 고향인 대학생 임재석(21)씨는 “설에 가족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해졌다”며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보수고, 부산에 사는 삼촌 가족은 민주당 지지자라 설에 얼마나 고성이 나올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임씨는 부모님께 “이번 설에 급하게 친구 아르바이트를 대신 서게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씨는 “부모님에게 한 소리 들었지만, 차라리 한 소리 듣고 설에 안 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며 “설 이후 계엄·탄핵 정국이 잠잠해지면 고향을 찾으려고 한다”고 했다.
서울 성북구에 거주하는 A(28)씨는 “과거의 가족처럼 유대감이 그리 깊지도 않는데, 만나기만 하면 서로 탄핵이 정당하네, 부당하네 싸운다”며 “조부모 두 분 다 돌아가신 후에는 차례도 형식적으로 된 지 오래라, 이번 명절에는 친척들 얼굴 안 보려고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강원 춘천이 고향인 직장인 유승혜(31)씨는 “친척들에게 불가피하게 설 연휴 기간 당직을 서게 됐다고 거짓말했다”고 했고, 서울 구로구에 거주하는 정윤상(28)씨는 “기차와 버스 등 교통편을 구하지 못했다고 둘러대 고향인 전남 목포를 이번에 가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인천 부평에 거주하는 신모(27)씨는 “계엄 이후 친척들끼리 너무 싸워서 단체 카카오톡방을 만들어 대화도 시도해 봤지만 결국 또 싸우기 일수였다”며 “서로 명절에 만나지 말자고 합의를 봤다. 가족들끼리 집에서 조촐히 음식이나 만들어 먹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MZ들의 ‘고향 안 찾기’ 현상에는 ‘설 밥상 민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정치권 동향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여의도 정치권에는 ‘설 밥상 설(說)’이 있다. ‘설 밥상 자리에 나오는 여론’이 앞으로의 정국 행방을 좌우한다는 설이다. 이 때문에 설을 앞두고 여의도에서 나오는 많은 정치 어젠다가 부정적인 현상으로 이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계엄 사태 이후 오히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친척들과 정치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이도 있었다. 경북이 고향이라는 20대 여성 최모(25)씨는 “계엄 이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돼, 나와 생각이 다른 친척들과 정치 얘기를 나눠보고자 고향에 내려간다”며 “부정선거든 정당한 계엄이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가족은 모든 사회의 시작”이라며 “가정 내에서 정치 같은 불편한 얘기를 하면 그런 불만이 자라서 세대에 대한 반발심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