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XX년생 ○○○씨 맞으시죠? 카드 배송차 연락드렸습니다. 카드 신청하신 적이 없다고요? 그러면 반송 처리해야 하는데…. 카드사 대표번호 1788-0XXX로 전화해 보세요.”
생년월일과 이름까지 언급하며 카드사의 ‘가짜 대표 번호’를 알려준 배송원의 연락은 보이스피싱의 시작이었다. 통상 업체 대표 번호는 ‘1X88’번으로 시작됐기에, 70대 A씨는 배송원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카드사 상담원은 “고객님 신용카드와 정상적으로 연동된 계좌가 있다”며 “명의 도용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안 점검, 악성 앱 검사, 사고 접수 등을 할 수 있는 앱을 ‘공식 앱스토어’에서 다운받으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내주는 앱 설치 링크는 절대 클릭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던 A씨는 직접 앱을 다운받으며 안심했다.
하지만 이는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이 만들어낸 원격 제어 앱이었다. 진짜 금융감독원 번호 ‘1332’로 전화해도 사기범들에게 연결되게 되어 있었다. 금감원 사칭범은 “최근 명의 도용 사건이 많이 접수됐는데, 그중 하나인 것 같다”며 “제가 금방 조사가 끝나도록 얘기해 둘 테니 검찰청 대표번호 1301로 전화하라”고 했다.
A씨는 검찰청에 전화했지만, 통화한 건 역시 보이스피싱 일당이었다. 검찰 사칭범은 “당신 명의로 계좌가 만들어져 불법 자금 세탁 사건에 이용됐고, 연루자들은 72시간 동안 조사 후에 구속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A씨가 명의 도용 피해자에서 ‘공범’이 되는 순간이었다. 검찰 사칭범은 “연락을 회피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수사 내용을 발설하면 바로 체포하고, 가족까지 소환장을 발부해서 구속한다”고 했다.
자신 때문에 자식들이 피해를 볼까 걱정된 A씨는 직접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돈을 보냈다. 은행이 이상 거래를 탐지해 확인했지만 소용없었다. A씨는 “아들의 사업 투자 목적 거래니까 관여하지 말라”고 답변하며 도움을 거절했다. 결국 A씨는 21억원의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카드 배송을 사칭하는 보이스피싱 피해가 급격히 늘고 있어 금감원은 소비자 경보를 주의에서 ‘경고’로 상향했다고 13일 밝혔다.
작년 하반기 금감원에 접수된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매달 크게 늘었다. 9월에 접수된 피해액은 249억원이었는데, 10월에는 453억원으로 늘었고, 12월에는 61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금감원은 그 원인으로 ‘가짜 카드 배송’으로 시작된 보이스피싱 수법에 속은 고령층이 거액의 피해를 입는 사례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작년 하반기 2억원 이상 고액 피해자의 약 80%가 여성이었으며, 그중에서도 60대 여성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특히 서울 강남 3구(서초‧강남‧송파)의 피해액은 서울 전체 피해액의 30%를 차지했다.
예전에는 카드 배송 미끼 문자만을 발송했던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문자 차단 대책 등이 시행되자 수법을 진화했다. 배송원을 사칭해 전화하거나, 위조된 실물 카드를 직접 배송하러 방문하는 경우도 생겼다.
피해자가 가짜 고객센터로 전화하면 공식 앱스토어에 등록된 원격 제어 앱을 다운받도록 유도해 경각심을 최소화했다. 검찰 사칭범은 가족도 수사 대상이 된다고 위협하는 역할을, 금감원 사칭범은 도와주는 역할을 맡으면서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했다.
여기에 더해 사기범들은 금융회사의 문진에 대비해 자금 사용처 등 답변을 사전에 교육했다. 금융회사나 통신사, 경찰까지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고 속여 피해자가 자신의 의지로 돈을 보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도움을 거절하는 사례도 생겼다.
◇신청 안 한 카드 배송, ‘카드사 홈페이지’에 나온 번호 확인해야
금감원은 본인이 카드를 신청하지 않은 경우 배송 직원이 알려준 번호가 아닌 카드사 홈페이지나 앱에 나온 전화번호를 통해 경위를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카드사 등 금융회사와 공공기관은 그 어떤 앱 설치도 요구하지 않는다며 “원격 제어 앱이나 악성 앱 설치가 조금이라도 의심된다면 가족 등 지인의 전화를 이용해 경찰이나 금감원에 상담하라”고 했다.
또한 최근 보이스피싱 수법은 주소, 계좌번호 등 개인 정보가 이미 노출된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실제 금융회사 상담센터와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등 교묘한 방식으로 진화해 피해자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했다.
금감원은 “통신사에서 제공 중인 AI 보이스피싱 탐지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당부했다. AI가 통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보이스피싱 의심 통화에 해당할 경우 이용자에게 경고 메시지 및 알람을 송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