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 후 서울의 일상이 된 탄핵 찬성·반대 집회가 외국인 관광객들의 다크 투어리즘(역사적 비극이나 재난 현장을 찾아가는 관광)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 외국인은 “방화·약탈·폭력이 없는 평화 시위가 인상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70년 번영을 구가해온 대한민국이 국제적 구경거리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나라 안팎 지적이 나온다.
서울 도심에 11만명 가까운 인파가 몰린 지난 15일 저녁, 서울 종로구 종각역 부근에선 탄핵 찬성 집회가 열렸다. 멍(김현정)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데이식스) 위플래시(에스파) 같은 가요가 흘러나왔다. 인근 광화문역에서 진행된 탄핵 반대 집회에선 아파트(윤수일) 손에 손잡고(코리아나) 같은 노래가 들렸다.
외국인들은 “시위 현장이 위험할 줄 알았는데 K팝 콘서트장 같다”며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독일인 미아(24)는 “도심 한복판에서 행인과 시위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뒤섞인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한국의 계엄 사태 이후 시위가 일상이 된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대체로 평화롭다는 점도 대단하다”고 했다. 적잖은 서양 관광객은 자국 시위에선 흔한 방화나 폭력을 탄핵 찬반 집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놀랍다고도 했다.
‘K팝 콘서트 같은 활기가 느껴진다’ ‘군중의 열기 속의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외국인들 입소문을 타고 아예 탄핵 시위 전용 관광 상품까지 출시됐다. 한 한국인 가이드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현장에서 탄핵 찬성 진영의 관점으로 외국인들에게 “이곳이 12·3 비상계엄 사태 현장”이라며 일종의 다크투어리즘 해설을 한다.
“한국의 시민들은 12월 3일 밤 계엄 선포 이후 국회가 계엄을 해제할 수 있도록 계엄군을 저지했고, 그 과정은 평화롭고 유쾌했다” “한국의 시민들이 그렇게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엔 민주주의를 위해 끝없이 싸워온 역사가 있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런 시위 현장 관광 상품을 홍보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싶은 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투어합니다” “국회의사당 근처의 콘서트 같은 한국 시위를 안내해 드립니다”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입니다” 같은 문구를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가이드도 있다.
인천국제공항이나 서울역에서 외국인들을 태우는 택시 기사들도 “사람이 제일 많은 시위 현장으로 가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가 적잖다. 서울 시내 주요 호텔도 “집회 뷰(view)가 나오는 방으로 예약해달라”는 외국인 문의 전화를 받고 있다.
네덜란드 관광객 스테파니 쉬퍼는 처음엔 뮤지컬의 한 장면 같아 시위 행렬을 따라다니며 춤을 추고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는 “시위 현장의 분위기에 익숙해질수록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러울 줄은 몰랐는데, 한국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미국인 앤 버텔슨(66)은 스톱더스틸(Stop the Steal·도둑질을 멈춰라) 팻말을 드는 탄핵 반대 집회를 보고 자국의 집회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는 “탄핵 반대 시위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모습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떠올랐다”며 “마치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주요 외신이 계엄·탄핵 사태가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가운데 시위 현장이 외국인들의 다크 투어리즘 대상으로 전락한 현실에 씁쓸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주말 집회에 나온 한 대학생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우리를 바라본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대량 학살이나 재난 등 역사적 비극이 발생한 현장을 방문하는 관광. ‘역사 교훈 여행’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서대문형무소, 비무장지대, 제주 4·3공원, 국립5·18민주묘지를 비롯,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미국 뉴욕 그라운드 제로, 일본 히로시마 원폭 돔 등이 대표적 다크 투어리즘 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