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하실 때부터의 과정이 쭉 제 손에서 느껴졌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작년 12월 29일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직후 희생자 수습 업무를 수행한 한 과학수사관이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
전남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차운 경감은 18일 공개된 BBC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계속 뉴스를 들으면서 왔는데, 당시엔 28명 사망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살아서 숨을 쉬고 계실 분이 계시리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시체 배낭이 계속 쌓이더라”라고 했다.
사고 직후 과학수사관들에게는 무안공항으로 집결하라는 긴급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현장에 도착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자가 있을 거란 희망이 사라졌다고 수사관들은 떠올렸다.
이번에 차 경감과 함께 수습 현장을 다시 찾은 과학수사계 김경희 검시관은 “천막에 모셔놓은 희생자분들을 보니까, 생존자가 있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차 경감 역시 “워낙 (희생자 시신의) 손상이 심했다. 시간이 갈수록 희망을 가질 그런 형편이 안 됐다”고 했다. 실제로 이날 사고로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81명 중 179명이 숨졌고, 꼬리 칸에 탑승했던 남녀 승무원 2명만이 살아남았다.
시신 역시 온전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수습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고 수사관들은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폭발과 화재 등으로 수색 범위마저 넓었다고 한다. 차 경감은 “시신의 미세한 조각까지 저희가 다 수거했다”며 “콘크리트 파편이 저기 나무까지 날아가고, 철조망 너머까지 비행기 의자가 날아갈 정도였다”고 했다.
차 경감은 “가장 중요한 건 시신의 신원 확인이었다”며 “지문 찍고 유전자 뜨고 하는 작업들, 번호 부여하는 작업이 가장 먼저 이뤄졌다”고 했다.
김 검시관은 “신원 확인할 때 손으로 다 확인하는데, 이때 ‘찰나의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며 “사망하실 때부터의 과정이 쭉 제 손에서 느껴졌다”라고 했다.
이후 유족에게 시신을 확인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수사관들은 유족이 받을 충격이 걱정돼 이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차 경감은 “(시신 훼손으로) 평소에 보던 모습과 다를 수 있으니 유족들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위로를 해주고 ‘한번 더 보시겠습니까’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가족은 아니지만, 그분들의 슬픔을 보니 정말...”이라며 목이 멘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김 검시관은 “딱 봤을 때 내 아이와 비슷한 연령대 희생자를 보면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이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되는데, 한번씩 꼭 이러더라”며 눈물을 훔쳤다.
이런 참사 수습의 기억은 이후 두 사람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차 경감은 “이번에 너무 힘들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MRI까지 찍었는데, 이상이 없다더라”며 “그런데도 (다리가) 계속 아팠다. 그래서 ‘지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황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 검시관은 “안치실에서 희생자 번호를 보고 시신 빼고 넣고를 계속하니까 꿈에서도 현장에서 계속 일을 했다”며 “2~3주 넘게 잠꼬대를 해서 남편이 하루는 ‘도대체 그 번호가 뭐야’라고 물어보더라”라고 했다.
이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차 경감은 “정말 어이없는 죽음들을 보는데,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인 개선을 먼저 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했다.
한편 여객기 참사 현장 수색 작업은 지난 1월 25일 종료됐다. 1100여 개 유류물이 수거됐으며, 이 가운데 500여 개는 유가족에게 전달됐고 훼손 상태가 심한 372개는 소각됐다. 수습 당국이 보관하던 유류품 228점은 지난날 말 전남 담양군 한 추모관에 안치됐다.
희생자 시신들은 사고 발생 48일 만인 지난달 13일 유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시신 훼손 정도가 심해 유전자 정보 대조 작업 등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시신 인도가 늦어졌다. 12·29 제주항공여객기참사 가족협의회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모든 희생자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됐다”며 “도와준 수습 당국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