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가 2011년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으로 영구제명한 선수들이 제기한 무효처분 소송 1심에서 진 뒤 항소를 포기한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 해당 선수들은 자격정지가 풀려 이미 축구계에서 제약 없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축구협회가 승부조작 영구제명 대상자들과의 소송에서 ‘패소할 결심’을 하고, 법원의 손을 빌려 이들을 ‘사실상 사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간조선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는 2011년 프로축구 K리그 승부조작 사건 당시 2차 가담자로 지목돼 대한축구협회가 제명한 전직 프로축구선수 A·B·C·D씨 4인이 축구협회를 상대로 제기한 ‘제명 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축구협회는 항소기간인 14일 내에 항소하지 않아, 이들의 영구제명 무효 판결은 확정됐다. 영구제명 처분 당시 절차적 문제가 있었던 탓에 축구협회는 관련 소송에서 번번이 지고 있지만, 하급심에서 항소나 상고를 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구제명 47명 모두 사면될 판
2011년 당시 프로축구 K리그는 승부조작 사건으로 홍역을 앓았다. 선수들이 불법 베팅 사이트와 연관돼 고의적으로 패배하는 데 직접 가담하거나 브로커를 자처했다. 2011년 8월 검찰에 기소된 현역 선수만 59명으로, 전체 등록선수 680명의 9%나 됐다.
승소한 4인은 선수로 활동할 당시 승부조작에 가담한 혐의가 적발돼 협회 산하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2011년 8월 ‘선수 및 관련 직무 영구박탈’, 이른바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다. 축구협회는 그해 10월 5일 징계위원회를 열고 이를 ‘축구계 전체 직무에 대한 자격상실’로 범위를 확대하는 처분을 내렸다.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 축구계에서도 선수와 지도자를 불문하고 선수 등록과 자격증 취득 등의 행위가 금지된 것이다. 이들은 형사소송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축구협회의 징계위원회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프로연맹의 요청대로 제명 처분을 의결했지만, 당사자들에게 징계위가 열린다는 사실이나 결과를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승부조작 사건 뒤 10년이 훌쩍 지난 2023년 9월 이들은 ‘출석이나 의견 진술의 기회가 없었고, 이의신청이나 재심절차도 밟지 못했다’며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이 같은 주장을 상당부분 인용해 제명 대상자인 원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징계처분으로 축구 관련 업무에 일절 종사할 수 없는 중대한 불이익이 존재하는데도 징계 절차에서의 소명 기회 미부여, 결과 미통지 등 중대한 절차상 하자가 존재한다”면서 “이러한 사정이 있는데도 무효확인을 구하기 위한 원고들의 권리행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전체 법질서에 반할 우려가 있다”고 판시했다.
2011년 당시 승부조작으로 제명된 선수는 모두 47명이다. 문제는 이들 모두 이번에 승소한 4명과 정확히 같은 절차를 밟아 징계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 축구협회는 최근 들어 영구제명 대상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연달아 패소하고 있다. 그러나 항소나 상고를 포기하지는 않고 있었는데, 이례적으로 이 사건에서는 항소를 제기하지 않았다.
축구협회 “자세한 이유 몰라”
축구협회가 계속해서 항소를 포기한다면, 2011년 징계처분을 받고 축구계로 복귀하지 못한 선수들이 모두 소송을 내 승소할 경우 이들의 자격 회복을 막을 방법이 없어진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주간조선에 “이번 사건에서는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론을 냈고,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다”며 “당시 승부조작 사건 관련해서 항소를 포기한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축구협회의 이번 항소 포기로 자격정지가 풀린 선수 4명은 지도자와 생활체육선수 등으로 축구계에 사실상 복귀한 것으로 확인됐다. 프로에서 수년간 활약한 A씨는 이미 대한축구협회 산하기관에 축구선수로 등록을 마쳤다. 축구협회는 2017년부터 동호인 선수도 협회에 가입비를 내고 등록하도록 하고 있는데, A씨는 경기도 화성시 축구협회의 E팀 소속 선수로 명단에 올라 있는 상태다. 경기도축구협회 관계자는 “A씨가 선수등록을 마친 것은 2월 13일 자”라고 전했다. 협회가 항소를 포기한 직후로, 축구협회장 선거가 한창 치러질 무렵이었다.
B씨도 경기도 수원의 F팀 소속으로 동호인 선수 등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국내 프로리그를 거쳐 승부조작 사건 이후엔 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바 있다. A씨와 B씨가 선수로 뛰고 있는 두 팀의 구성원은 모두 명목상 동호인들이지만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명부에 따르면 전직 프로선수와 감독 등이 소속돼 있다.
지도자로 활동하는 인물도 있다. 청소년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된 경력이 있는 C씨는 경기도 시흥의 G팀 15세 이하 팀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해당 구단 관계자는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지도자는 아니고 임원으로 축구협회에 등록되어 있다”며 “(1월) 판결 이후부터 대한축구협회에서도 등록을 받아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구제명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한 축구계 관계자는 “이번 소송에서 이긴 다른 선수는 물론 제명처분 무효소송에서 이긴 선수들이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해 중학교, 고등학교 등의 코치로 취업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축구계가 넓지 않고 이들이 프로 출신인 만큼, 취업 자체는 쉽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대한축구협회가 처음부터 승부조작 사범에 대해 온정적이었다는 주장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제기됐다. 사건 2년이 채 되지 않은 2013년 7월에는 협회 산하 프로축구연맹이 영구제명 선수들 가운데 18명의 해제를 결정했다가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철회했다. 프로연맹은 보호관찰 대상자로 지정된 선수들이 일정기간 ‘봉사활동’을 하면 사면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발표를 한 바 있었다.
사건 12년 뒤인 2023년 3월 28일에는 승부조작으로 영구제명된 선수들 전원에 대해 사면을 결정한 뒤 다시 여론의 포화를 맞고 이를 철회한 바 있다. 당시 축구협회는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서울월드컵경기장 회의실에서 이사회를 열어 영구제명 47인을 포함해 축구인 100명을 사면한다고 ‘기습 발표’했었다. 법원의 무죄 판결, 수사기관의 불기소 결정이 확정된 경우에만 징계를 해지 및 취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대한체육회 규정에도 어긋난다.
축구협회가 또다시 승부조작에 대한 안일한 시각을 드러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축구 전문가는 “제명 절차가 당시 잘못되었다면, 징계위원회를 다시 구성하는 등의 자구 노력이 있었어야 한다”며 “협회가 계속된 패소에도 사실상 제명된 선수들의 복귀를 허용하고 있는 것은 승부조작에 대한 진지한 근절 의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