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연구자로 오르기까지 30년 걸렸다. 그런데 당장 은퇴해야 한다면 국가 손실 아닌가.”(나노 소재 분야·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해외 출장 가서 정년이 2년 반도 안 남았다고 하면 외국 석학들이 깜짝 놀란다.”(유체역학 분야·최해천 서울대 기계공학부 석좌교수)
서울대에서 국제적으로 탁월한 성과를 낸 교수들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석좌교수’로 임용된 교수 13명 중 절반 이상인 7명의 임기가 불과 2년도 안 남은 것으로 2일 확인됐다. 반도체와 나노·유체 역학부터 북한 경제 등 우리 학계는 물론 전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학자들이 계속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선정된 ‘간판급’ 교수 대부분이 곧 연구를 접고 은퇴한다는 뜻이다. 학계에선 “선진국과 비교해도 경쟁력이 뒤지지 않는 교수들이 나이와 무관하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본지가 이날 서울대 석좌교수 전원의 명단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외부 초빙 교수 2인을 제외한 내부 임용 석좌교수 중 3명이 1년 내, 7명이 2년 내, 9명이 3년 내 퇴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은 평균 퇴임 시점은 불과 3.3년이다. 서울대는 지난 2017년부터 재직 교수 중 국제 학술상 수상자나 전문 분야에서 국내외로 유명한 ‘스타 교수’ 등에 대해 매년 4~5명을 석좌교수로 임용하고 있다. 석좌교수들은 연 2400만원의 학술 연구 활동비 지급, 교원 책임 시간 3시간 감면, 국외 여행 출장 일수 확대(21→42일)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는다. 그러나 65세 정년이 다하면 이런 혜택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
교수 정년 문제로 인한 서울대 교수들의 이탈 문제는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달엔 한국경제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가 중앙대로 옮겼다. 2014년 이 교수는 비서구권 학자로는 최초로 ‘슘페터상’을 받았다. 당시 이 교수는 이직하면서 “정년 연한에 상관없이 연구와 교육을 지속할 기회를 가지게 돼 매우 기쁘다”고 했었다. “정년 문제 때문에 사실상 ‘스타 교수’를 뺏긴 것”이란 이야기가 당시 서울대 내에서 나왔다. 그에 앞서 나노 물리학 대가로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거론돼 왔던 임지순 울산대 반도체학과 석좌교수도 지난 2016년 서울대에서 포스텍으로 이적했다. 곧 퇴임하는 서울대 석좌교수 일부는 “여러 대학에서 이직 제의를 받은 상태”라고 했다.
정년이 임박한 서울대 석학교수들의 ‘위기감’은 거세다. 반도체 분야 석학 황철성(61)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과학기술 발달로 한 분야를 과거보다 더욱 오랫동안, 깊게 파야 대가(大家)가 되는 시기가 됐다”며 “예전 같으면 10년 걸려 도달할 연구 수준도 이제 기술이 복잡해지며 20년은 걸리는데 65세는 너무 짧다”고 했다. 최해천(63) 서울대 기계공학부 석좌교수는 “해외 출장 가서 정년이 2년 반도 안 남았다고 하면 외국 석학들이 깜짝 놀란다”며 “35세쯤 교수가 돼 새로 대학원생을 받지 못하는 60세쯤 퇴직 준비를 하니 실질적으론 25년 정도만 일하는 셈인데 30세부터 70세까지 보통 일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고 했다. 북한 경제 대가인 김병연(63) 경제학부 석좌교수는 “한국에 북한 경제를 전공하는 경제학 교수는 나 하나뿐”이라며 “연구를 더 못 한다는 개인적 아쉬움보다도 북한 경제 전공이 한국 대학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더 크다”고 했다.
석좌교수들은 한국의 정년 제한이 국제 경쟁력에도 상당한 타격이라고 지적했다. 현택환(61)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는 “최근 과학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거의 따라잡은 중국은 성과가 좋은 교수들에게 파격적으로 정년 예외 제도를 시행한다”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처럼 종신 교수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황윤재(65) 경제학부 석좌교수는 “연구란 1~2년 단위로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축적되면서 최종 결과물이 나와 장기적으로 (연구) 기간을 보장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며 “80세가 넘는 노벨상 수상자도 많은데 65세에 은퇴하는 건 학문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고등교육법상 교수의 정년은 65세로 고정돼 있다. 그러나 이미 일부 대학에선 우수한 성과를 낸 교수에 대해선 정년 이후에도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고 있다. 포스텍은 올해 50대 때부터 우수 교수의 경우 평가를 통해 70세까지 정년을 연장해 주도록 했다. 카이스트는 70세가 넘어서도 ‘정년 후 교수’ 형태로 근무하도록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예산 사용이 자유로운 사립대 포스텍 등과 달리 국립대인 서울대는 의사 결정이 한참 느리다”며 “서울대가 정년 후 교수 제도를 도입한다면 국공립대 최초가 될 것”이라고 했다.
위기감을 느낀 서울대에서도 대책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총장 직속 자문 기구인 제도혁신위원회(혁신위)는 우수 교수들에 한해 정년 이후에도 일정 기간 재취업 형태로 정년을 연장하는 안 등을 지난달부터 연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년을 의식해 50대 중반에 미리 다른 대학으로 옮기는 교수가 많아질 것을 대비해, 55세 이전에 미리 정년 연장을 보장해주는 안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