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아파트에서 21일 오전 방화로 불이 나 방화 혐의를 받는 60대 남성이 현장에서 숨지고 아파트 주민 6명이 다쳤다. 이 남성은 농약 살포기에 기름을 넣고 불을 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조사 결과, 용의자는 작년 말까지 불을 지른 곳 아래층에 살면서 윗집 주인과 층간 소음 문제로 갈등을 겪은 것으로 확인됐다.

아파트 불내기 전에… 인근 빌라 앞에서 '점화 테스트' - 21일 오전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빌라 앞에서 60대 남성이 농약 살포기로 불을 쏘고 있다(왼쪽 사진). 흰 통 안에는 기름이 담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 남성은 같은 방법으로 봉천동 아파트 4층에 불을 질렀다. 아파트에 연기가 치솟는 모습(오른쪽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독자 제공

경찰과 소방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 17분쯤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지상 21층 높이 아파트 4층에서 “폭발 소리와 함께 불이 났다” “사람이 매달려 있다”는 등 신고가 들어왔다. 이 화재로 불을 지른 용의자 이모(61)씨가 4층 복도에서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됐다. 404호 여성 주민 최모(81)씨와 401호 여성 주민 A(69)씨 등 두 명이 전신 화상 등을 입고 4층에서 추락해 중상을 입었다. 다른 주민 4명도 연기 흡입, 호흡 곤란 등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이씨는 이날 불이 나기 10여분 전인 8시쯤 불이 난 아파트에서 1.4km 떨어진 자택 근처 빌라에서 농약 살포기로 세 차례 불을 내뿜어 방화를 시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이후 기름통을 실은 오토바이를 타고 아파트로 이동해 불을 냈다. 경찰은 이씨가 불을 지른 아파트 주차장에서 이씨의 오토바이를 발견한 뒤 이씨가 농약 살포기를 들고 아파트로 올라가는 CCTV 영상을 확인했다. 용의자는 방화 도구로 기름을 넣어 발화할 수 있는 농약 살포기 형태 토치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 당시 상황을 담은 사진에는 흰색 모자와 마스크를 쓴 이씨가 흰 통에 담긴 액체와 농약 살포기 형태의 기구를 연결해 불을 붙이는 장면이 포착됐다. 이씨가 사용한 오토바이 뒷좌석에서는 기름통이 발견됐다. 이씨 집에선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는 유서와, 어머니 병원비로 쓰라며 남긴 현금 5만원이 발견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은 아파트 화재 20~30분 전 인근 빌라 앞 쓰레기 더미 등에서 발생한 소형 화재도 이씨 범행으로 확인했다.

당시 화재 영상을 보면 아파트 4층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불길 때문에 건물 자재가 떨어졌다. 이날 취재진이 찾은 화재 현장 4층은 복도와 천장이 꺼멓게 탔고, 천장에 붙어 있던 등도 불에 녹아내렸다. 같은 동 5층 주민은 “아침부터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나서 누가 뭘 설치하나 보다 했는데 불이 나서 깜짝 놀랐다”며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나 보일러실이 터진 줄 알았다”고 했다. 다른 주민은 “‘펑’ 터지는 소리가 나 창문으로 확인해 보니 4층에 살던 할머니가 난간에 매달려 있다 떨어졌다”며 “다들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 하소연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이진영

경찰은 이씨가 층간 소음을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이씨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공공 임대로 이 아파트에 입주해, 작년 11월까지 화재가 난 곳(401호) 아래층에 살면서 위층 주민 A씨와 층간 소음 문제로 다퉈왔다. 이씨는 작년 9월 추석 연휴 때 온 가족이 모여 있던 윗집을 찾아가 “시끄럽다. 나와보라”고 소리를 질러 윗집 아들과 몸싸움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경찰이 출동했지만 서로 처벌을 원치 않아 사건이 종결됐다. 당시 이씨와 싸운 A씨의 아들 정모(45)씨는 “이후 이씨가 새벽에 북과 장구를 치고 소리를 질렀다”며 “(어머니가) 집에서 자고 있는데 이씨가 망치로 천장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

이씨는 다른 이웃들과도 지속적으로 말싸움 등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본지와 만난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곳곳에서 툭 하면 시비와 함께 욕을 하고 고성을 질러 이웃들이 힘들어했다”고 했다.

경찰에 따르면 2021년 1039건이었던 방화 건수는 2022년 1229건, 2023년 1203건으로 증가세다. 일각에선 농약 살포기를 이용한 이번 방화 사건을 계기로 모방 범죄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공하성 우석대 교수는 “(방화에 사용될 수 있는) 기름이나 농약 분무기 구매 등에 자격 요건을 두고, 시너 등 기름을 다량 구매하는 것에 제한을 둬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