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로축구 렉섬의 공동 구단주인 라이언 레이놀즈(오른쪽)와 롭 매컬헤니가 27일 팀의 3연속 승격을 확정 지은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영화 ’데드풀’로 세계적 인기를 모은 할리우드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49)는 2020년 봄 설레는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알고 지내던 동료 배우 롭 매컬헤니(48)에게서 왔다. “축구 팀 하나 사지 않을래?”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매컬헤니는 (넷플릭스)스포츠 다큐멘터리 ‘죽어도 선덜랜드’에 깊은 감명을 받은 터. 축구 팬들의 열정에 반한 그는 (선덜랜드처럼)쇠락한 도시 축구팀을 인수해 지역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팀은 웨일스 북부 인구 5만명 소도시 렉섬(Wrexham)을 연고로 하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5부 리그 렉섬AFC. 1864년 창단한 렉섬은 세계에서 셋째로 오래된 축구 클럽. 홈구장 레이스코스 그라운드는 현재까지 사용하는 경기장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무너진 도시 속에서 팬들만은 등을 돌리지 않은 팀이란 서사는 (선덜랜드와)비슷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5부 리그 팀이라 해도 혼자 사기엔 버거웠다. 고민하던 차에 떠올린 이름이 레이놀즈였다. ‘데드풀’로 세계를 뒤흔든 스타. 영상 제작, 주류, 통신 사업까지 손댄 유능한 사업가. 매컬헤니는 감을 믿었다. 레이놀즈는 렉섬을 몰랐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듣고 또 듣다 보니 알게 됐다.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그렇게 둘은 2020년 11월 렉섬 AFC 인수를 공식 발표했다. 레이놀즈는 “이건 단순한 사업이 아니다. 이곳 사람들과 오래 남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면서 “우리는 이 도시를 사랑하고 렉섬이 펼쳐낼 특별한 이야기를 함께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전문 경영진을 데려오고, 훈련장과 경기장을 뜯어고쳤다. 경기 날이면 다채로운 이벤트를 열었다. 축구는 다시 이 도시 심장, 축제로 자리 잡았다.

가장 큰 무기는 다큐멘터리였다. ‘웰컴 투 렉섬’(디즈니플러스). 이들이 구단주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 영상은 전 세계 스포츠 팬들 마음을 훔쳤다. 시즌 3까지 나왔고 4번째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결과는 눈부셨다. 렉섬 축구 팀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2만명에서 150만명으로 치솟았다. 2019년 대비 지역 방문객 수는 220% 늘었다. 구단 가치는 인수 당시 200만파운드(약 38억원)에서 1억2000만파운드(약 2300억원)로 뛰었다. 사업적으로도 성공이었고, 감성적으로도 승리였다.

성적도 따라왔다. 2021년 여름, ‘승격 전문가’로 통하는 필 파킨슨(58) 감독을 데려왔다. 브래드퍼드, 볼턴 등 이전 축구 팀들을 승격으로 이끈 명장. 이후론 동화의 연속이었다.

27일 경기장에서 친구 가족들과 함께 렉섬을 응원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오른쪽)와 롭 매컬헤니. /AP 연합뉴스

렉섬은 2022-23시즌 5부 우승으로 4부, 2023-24시즌 4부 2위로 3부 리그까지 올라갔다. 3부 팀(케임브리지)에 있다가 ‘렉섬 프로젝트’에 매료돼 합류한 공격수 폴 멀린(31)은 네 시즌 동안 110골을 터뜨렸다. 그는 렉섬이 리버풀 집과 가까워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다진 안정감을 토대로 활약했다. 3년 연속 렉섬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

이 작은 팀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27일. 렉섬은 찰턴을 3대0으로 꺾었다. 승점 89를 확보, 최종전과 상관없이 2위를 확정하며 2부 리그(챔피언십) 승격을 이뤘다. 43년 만에 되찾은 2부 리그 유니폼이다. 5부 리그부터 3년 연속 승격을 이루는 기적을 달성했다. 잉글랜드 프로 축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경기가 끝나자 렉섬 팬들은 그라운드로 쏟아져 선수들을 목말 태우고 이름을 연호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레이놀즈는 “5년 전, 우리가 프리미어 리그 진출을 말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 이제 꿈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프리미어 리그 진출까지는 한 계단만 남았다.

2부 리그 승격을 확정지은 렉섬 선수들이 경기 후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레이놀즈처럼 축구 팀에 투자한 스타 구단주는 여럿 있다. 배우 매슈 매코너헤이(56)는 메이저리그 축구(MLS) 오스틴FC 공동 구단주다. 미식축구(NFL) 스타 톰 브레이디(48)는 잉글랜드 2부 리그 버밍엄시티 주주다. 미 프로 농구(NBA) 스타 르브론 제임스(41)는 잉글랜드 축구 프리미어 리그(1부) 리버풀 공동 구단주로 유명하다.

레이놀즈가 이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순한 투자도, 취미도 아닌, 도시를 품고, 과거를 끌어안은 프로젝트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오래된 클럽, 부서진 꿈, 잊힌 거리에서 다시 감동을 지폈다. 올해 렉섬의 봄은 레이놀즈 덕에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