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지난 7일(현지 시각)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열었어요. 대규모 군사 행진도 했죠. 이 전투로 베트남은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죠.

디엔비엔푸 승전 7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베트남을 찾은 프랑스 국방부 장관(오른쪽에서 넷째)이 전몰자들이 묻힌 묘지로 들어서고 있어요. /EPA 연합뉴스

행사에는 각 나라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했어요. 그중에서도 프랑스 국방부 장관과 보훈부 장관이 화제가 됐어요. 프랑스가 베트남의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 정부 대표단을 파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해요. 베트남이 한때의 침략국이자 패전국인 프랑스 정부 대표단을 기념식에 초청했고,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례적인 풍경이 연출된 거예요.

베트남 총리는 프랑스 측 인사의 참석에 대해 “과거를 마무리하고 차이를 넘어 미래를 향해 나가려는 노력”이라고 환영했는데요. 베트남과 프랑스, 두 나라 사이에는 어떤 과거가 있었던 걸까요?

프랑스, 베트남에 관심 가져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찾아 아시아로 향했고, 프랑스도 무역을 목적으로 베트남에 진출했어요. 하지만 프랑스의 더 큰 관심은 선교였습니다. 베트남에서는 17세기부터 가톨릭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가 대표적이었어요. 베트남은 가톨릭 전파로 전통 사회가 무너질 수 있고 더 나아가 프랑스의 군사 침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선교사들의 활동을 반기지 않았어요. 베트남의 가톨릭 탄압 정책이 점차 심해지자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베트남 침략을 결심합니다.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전투에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 수송을 묘사한 자전거를 끌고 행진하고 있어요. /AFP 연합뉴스

프랑스는 왜 베트남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에 식민지를 확보해가던 와중에 아직 누군가가 차지하지 않은 베트남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죠. 특히 베트남이 중국과 지리적으로 붙어 있는 만큼, 베트남을 차지하면 중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죠.

프랑스는 베트남에 외교 사절을 보내 가톨릭 포교의 자유, 통상 수교 등을 요구했어요. 베트남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1858년 침략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에스파냐도 베트남에서 자국 선교사가 처형된 일을 구실로 프랑스에 일부 병력을 보탰습니다. 당시 베트남에선 국내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는데요, 이를 처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베트남은 프랑스와 1862년까지 4년간 전쟁을 벌인 끝에 협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맺어진 조약이 바로 ‘제1차 사이공 조약’이에요.

사이공 조약은 가톨릭 포교의 자유 인정,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 지방) 지역 3개 성 할양(割讓·영토를 다른 나라에 넘겨줌), 항구 3곳 개방, 피해보상금 지급 등으로 불평등한 내용이었어요. 12년 후인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맺어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주권을 갖게 됐어요. 하지만 프랑스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베트남에 다시 군대를 파견합니다. 제대로 대응할 수 없던 베트남은 프랑스가 제시한 또 다른 불평등 조약인 ‘후에 조약’을 받아들이면서 1883년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보호국)가 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지배 아래 놓인 베트남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하려고 한 청나라는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어요. 청나라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졌고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독점적 권한을 갖게 됐습니다. 프랑스는 1887년,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을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고 총독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어요. 그리고 6년 뒤에는 라오스도 편입했죠.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를 ‘코친차이나’, 중부를 ‘안남’, 북부를 ‘통킹’이라 칭하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어요. 하지만 프랑스의 간섭 정도만 달랐을 뿐 베트남 전체가 프랑스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답니다.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통치는 어땠을까요? 우선 프랑스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해 베트남 내 저항 운동을 무력화했어요. 그렇지만 군대만으로는 식민 통치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죠. 그래서 프랑스는 통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각종 근대 시설과 도로, 교량, 철도, 전신 같은 인프라 구축에 나섭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어요. 이를 마련하기 위해 세입을 늘리고자 했습니다. 술과 소금 등에 대한 전매 제도를 시행하고, 주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죠. 프랑스는 근대화 명목으로 교육 개혁, 의료 시설 개선 등을 내세웠지만 이러한 혜택은 현지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용 부담은 고스란히 현지인들이 떠안았죠.

베트민들, 게릴라 전술로 프랑스군 상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프랑스를 상대로 투쟁을 이어갔어요. 이후에 베트남의 초대 국가 주석을 지낸 호찌민(1890~1969)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들의 노력에도 독립 투쟁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1945년 3월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던 일본군이 프랑스 식민 정부를 무너뜨리면서 베트남이 이번엔 일본군의 점령지가 됐기 때문이에요. 당시 일본군이 베트남을 점령한 목적은 식민지 경영보다는 천연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에서 새롭게 성장한 정치 세력이 바로 ‘베트민(공산주의 독립운동단체)’입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패망한 1945년 9월 호찌민은 베트민을 기반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베트남의 초대 국가 주석을 지낸 호찌민(왼쪽). 호찌민과 함께 디엔비엔푸 전투를 이끈 보응우옌잡 장군(오른쪽). /위키피디아

일본군은 물러났지만, 베트남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이 본인들 차지가 돼야 한다고 다시 주장하며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1946년 프랑스군은 하노이의 동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 하이퐁을 공격하고, 하노이로 진격했습니다. 이에 맞서 베트민들이 하노이에 있던 프랑스군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프랑스군은 탱크, 전투기 등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어요. 정규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베트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산악 지대로 퇴각했어요. 그리고 여기에 숨어서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밀림에 숨어 신출귀몰하는 베트민들을 상대하느라 고전했어요. 이를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1954)였죠. 이 전투는 베트남 국부 호찌민과 함께 군을 이끈 보응우옌잡(1911~2013) 장군이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패하면서 프랑스와 베트남의 전쟁은 막을 내리고, 프랑스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처음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한 지 90여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