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 열리는 한 경매에 19세기 제작된 책가도(冊架圖)가 나온다고 해요. 이 책가도는 보존 상태가 뛰어나서 추정 가치가 최대 8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책가도는 책과 도자기·문방구·향로 등이 책가(책장) 안에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여러 귀중품이 함께 그려져 있어 조선의 생활상이 어땠는지 상상해볼 수 있게 해주지요.
책가도는 조선 후기 궁중과 상류층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까지 확산되며 핵심적인 민화로 자리 잡게 되었답니다. 책가도는 작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경매에서 10억원에 가까운 금액에 낙찰되는 등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오늘은 조선 시대에 계층을 불문하고 책가도가 유행하게 된 배경과 이 그림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궁궐에 책가도 걸어 놓은 정조
책가도는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에 의해 처음 제작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조선 시대엔 어좌(왕이 앉는 의자) 뒤에 왕권을 상징하는 그림을 걸어두었어요. 해와 달, 산을 그린 ‘일월오봉도’가 걸렸죠.
그런데 정조는 그 대신 책가도를 설치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요.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 하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이처럼 정조는 책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책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왕이었어요.
정조는 학문과 법령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문치(文治)를 펼치려고 했습니다. 책가도에 대한 애정에는 그런 정조의 구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궁중 화가(화원)들에게 책가도를 그릴 것을 여러 차례 명령했어요. 그래서 현재 전해져 오는 책가도 중 화원들이 그린 것이 많이 있어요. 정조는 책만큼이나 책가도를 아꼈어요. 책가도를 해괴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화원을 귀양 보내기도 할 정도였어요. 정조는 “일이 많아서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엔 책가도를 보면서 마음을 푼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정조로부터 시작된 책가도 열풍은 궁궐 밖 양반들에게까지 확산됐어요.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양반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만큼, 이들에게 책은 곧 출세의 상징이었어요. 조선 후기 문인 이규상(1727~1799)이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책가도를 벽에 붙여놓고 유식한 체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어요. 책가도는 양반들의 사랑방이나 서재에 많이 놓였습니다.
동식물·귀중품도 그렸죠
책가도를 보면 단순히 책만 그린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진귀한 물건들도 함께 등장해요. 특히 책가도가 유행한 18~19세기는 중국을 통해 조선에 서양 문물이 활발히 들어오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궁중 화가들이 제작한 책가도에는 서민들이 쉽게 볼 수 없었던 북경 도자기, 자명종, 안경 등이 나타나기도 해요. 당시 왕실이나 상류층의 기호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에요.
책가도에 그린 귀중품들에는 여러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책가도에 살구꽃을 그린 경우가 있는데,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선비에게 살구꽃 아래에서 향연을 베풀어주었다고 해요. 그래서 책가도에 그린 살구꽃에는 과거 급제와 입신양명을 바라던 선비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종종 공작의 깃털을 그린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이는 관직과 지위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책가도엔 간혹 도장을 그려놓는 경우가 있어요. 그리고 그 도장을 눕혀 글자가 새겨진 면이 보이게끔 그리곤 했습니다. 그 글자를 자세히 보면 화가의 이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요. 책가도를 그린 화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었답니다. 대부분의 궁중 회화와 민화에는 화가의 이름이 없어 누가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책가도에서는 이와 같은 재치 있는 관습을 확인할 수 있어요. 실제로 궁중 화가 이형록은 자신이 그린 책가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도장을 그려 놓았어요. 처음에는 작자 미상 작품으로 알았지만, 훗날 그림에서 이 도장이 조명되면서 화가의 정체가 알려졌답니다.
국왕부터 서민까지 책을 사랑한 나라
궁중화풍의 책가도는 19세기에 이르러 민화로 확산됐어요. 민간에서는 보통 책가를 그리지 않고 책을 비롯한 일상적인 사물만 표현했어요. 궁중과 달리 민간에서는 책가도를 담을 수 있는 병풍의 크기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의 형식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었어요. 이런 그림들은 책가가 사라졌기 때문에 ‘책가도’가 아니라 ‘책거리(책을 소재로 한 그림)’라고 부르지요.
민간에서 유행하던 책거리는 궁중에서 그렸던 책가도와 다양한 차이를 보입니다. 상대적으로 책의 비중이 줄고 문방구가 늘었어요.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는 책가 대신 작은 탁자들을 그려 넣으며 그림의 구성 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어요. 작은 화면에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사물 간의 간격은 좁아졌습니다. 또 한 줄기에 많은 열매가 열리고 씨앗이 많이 있는 수박, 참외, 가지, 오이 등이 등장합니다. 이는 다산과 득남을 상징했지요. 이처럼 책거리에선 서민들의 일상적인 염원을 나타내는 사물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양반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책을 늘 곁에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에 온 프랑스 장교 주베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어느 집이든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