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어요. 바다 위에 떠 있는 주황색 공 모양 기구가 ‘테왁’이에요. /허영숙 사진작가(제주특별자치도)·한국정책방송원·대한민국역사박물관·제주학연구센터·국립제주박물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요. 제주 방언 ‘폭싹 속았수다’란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란 뜻이에요. 주인공 어머니의 직업인 해녀(海女) 역시 관심을 모으고 있죠. 극 중 해녀인 ‘광례’는 힘든 물질(해녀들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따는 일)을 자기 딸에게는 시키지 않으려고 억척스럽게 일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해녀는 우리 역사에서 언제 등장했을까요?

17세기 초 기록에 ‘물질하는 잠녀’ 등장

‘해녀’의 사전적 의미는 ‘바닷속에 들어가 해삼, 전복, 성게, 소라, 미역 등을 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예요. 아무런 기계 장치 없이 물로 들어가는 것이죠. 이들을 ‘잠녀(潛女)’ ‘잠수(潛嫂)’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해녀는 대부분 제주도에서 활동하는데, ‘제주 해녀 문화’는 이미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돼 세계적인 무형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해녀는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어요. 제주 해녀는 일본 해녀보다 깊이 잠수하고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사시사철 조업하는 등 강인함이 두드러진다고 합니다.

18세기 초 그려진 ‘탐라순력도’엔 해녀들이 바다에서 작업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어요. /허영숙 사진작가(제주특별자치도)·한국정책방송원·대한민국역사박물관·제주학연구센터·국립제주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부터 바다에 들어가 바다 깊은 곳에서 어패류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제주도는 고려 시대부터 전복과 미역 등을 진상(進上·진귀한 물품이나 지방 토산물을 임금에게 바침)했다고 해요. 조선 시대에 들어선 진상하는 일을 제주 해녀가 맡게 됐고, 기록에도 해녀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17세기 초 이건이 쓴 ‘제주풍토기’엔 잠녀의 물질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요. 1702년(숙종 28년) 제주 목사 이형상이 제주도를 시찰한 모습을 그린 화첩인 ‘탐라순력도’에는 잠녀들이 바다에서 작업하는 모습이 나오죠.

숙종 때 문신인 김춘택은 제주도 유배 시절(1706~1710) ‘잠녀설’이란 글을 썼는데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전복을 따는 것은 미역을 채취하는 것에 비해 매우 어렵고 고돼, 잘못하면 그 얼굴이 시커멓게 초췌해져 걱정과 고난으로 죽다가 살아난 모습을 하게 된다.” 300여 년 전에도 해녀 일은 고달픈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중국·러시아 진출…항일운동 나서기도

제주 해녀들은 해산물을 채취할 뿐 아니라 그 해산물을 시장에서 팔고, 틈틈이 농사를 지을뿐더러 집안 살림도 맡습니다. 왜 여성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경제 활동에 나서게 됐던 걸까요? 제주도를 삼다도(三多島)라 하죠. 돌과 바람, 여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농사를 짓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을 의미해요. 여자가 많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남자가 적다는 것인데,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으로 죽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이런 환경에서 제주도의 여성은 바당(‘바다’의 제주 방언)에 뛰어들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죠.

20세기에 접어들면 제주 해녀의 활동 무대는 무척 넓어집니다. 부산과 울산, 강원도·함경도·울릉도는 물론, 멀리 중국 다롄·칭다오 일대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까지 진출해 원정 작업을 했던 것이죠. 가내의 생계를 넘어서서 ‘조선의 중대한 산업’으로까지 부각됐던 것입니다.

1932년 제주 해녀들이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며 벌인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 당시 해녀들의 첫 집결지였던 제주시 구좌읍 연두망동산에 세워져 있어요. /허영숙 사진작가(제주특별자치도)·한국정책방송원·대한민국역사박물관·제주학연구센터·국립제주박물관

해녀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 항일운동을 벌이기도 했어요. 대표적인 것이 1932년 1월 일본인 선주의 횡포와 해녀에 대한 부당한 착취에 저항하기 위해 제주시 구좌읍·성산읍·우도면 일대에서 일어났던 ‘제주 해녀 항일운동’입니다. 이 운동을 기리기 위해 구좌읍에 세워진 기념탑 옆에는 제주해녀박물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제주 해녀는 보통 수심 20m의 바닷속으로 들어가 2분 남짓 견딜 수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도 상군·중군·하군으로 계급이 나뉘는데, 상군은 수심 15m 이상, 중군은 8~10m, 하군은 5~7m에서 작업한다고 합니다.

제주도 경제의 큰 부분을 담당해 온 해녀는 최근 들어 그 수가 크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1970년만 해도 1만4000명이 넘었는데 최근엔 3000명 아래로 떨어졌다는 거예요. 70세 이상 고령자가 60%를 넘고, 50대 후반 해녀가 ‘애기 해녀’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제주시의 어떤 식당에선 ‘해녀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해산물이 잘 채취되지 않아 부득이 가격을 올립니다’라는 안내문을 적어 놓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전히 제주 바닷가엔 불턱, 테왁, 숨비소리

하지만 여전히 제주도 바닷가를 걷다 보면 잠수복을 입고 물질에 나서는 ‘해녀 삼춘’들을 여럿 볼 수 있어요. 제주도에서 ‘삼촌’이나 ‘삼춘’은 남녀 구분 없이 웃어른을 일컫는 말이에요. 예전 해녀들은 전통 해녀복인 흰 원피스 형태의 ‘물소중이’를 입었는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초반에 나오는 해녀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엔 고무로 만든 잠수복으로 바뀌었어요. 고무 잠수복은 체온을 유지하고 수압을 견디는 데 뛰어나다고 해요.

1950년대 제주 해녀들. 당시 해녀들은 흰색 원피스처럼 생긴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을 했어요. /허영숙 사진작가(제주특별자치도)·한국정책방송원·대한민국역사박물관·제주학연구센터·국립제주박물관

해변에서 또 눈에 잘 띄는 것이 돌로 쌓아놓은 ‘불턱’입니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물질하고 나와 쉬는 장소이고, 회의도 이뤄지는 장소입니다. 바다 위에 여기저기 ‘테왁’이 떠 있는 것도 볼 수 있어요. 해녀가 물질을 할 때 몸이 뜨게 하는 공 모양의 기구인데, 물속에 들어갔다가 잠시 나와 쉴 때 쓰기도 하죠. 예전에는 박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스티로폼을 쓴다고 해요. ‘숨비소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잠수했던 해녀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숨을 내뱉는 소리인데, 긴 휘파람과도 비슷한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유네스코는 2016년 ‘제주 해녀 문화’를 인류무형유산에 등재했어요.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강화하는 ‘잠수굿’, 바다로 나가는 배 위에서 부르는 노동요인 ‘해녀 노래’ ‘물질 문화’ 등이 소중한 유산임을 인정한 것이지요. 또한 이런 문화가 어머니에서 딸로,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세대 간 전승되며 ‘여성의 역할’이 강조되고,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도 높이 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