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허자(步虛子)’라는 제목의 두 공연이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에서 각각 올려졌습니다.

‘보허자’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허공을 걷는 자’라는 뜻이에요. 보허자는 본래 중국 도교의 의식 음악이었는데, 도교에서 ‘보허’라는 표현은 신선이 구름 위나 허공을 밟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의미한답니다.
‘보허자’는 송나라 때 우리나라로 전해져 고려와 조선의 궁중 음악이 됐어요. 원래 노래 가사도 있었는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가사는 사라지고 기악 합주곡 형태로 바뀌었어요. 기악은 악기만으로 연주되는 음악이에요.
조선 시대 보허자는 왕의 행차가 궁으로 돌아올 때 연주됐고, 왕세자 책봉 등 국가 행사의 잔치에서 궁중 무용수들이 춤출 때 배경 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대요.
이번에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두 작품은 ‘보허자’를 재해석해 만든 정악(궁중·상류층 음악)과 민속악(민간 음악) 공연인데요. 오늘은 제목은 같지만 다른 매력을 가진 두 공연을 만나보겠습니다.
기악에 노랫말 붙인 효명세자
먼저 지난 14일까지 국립국악원에서 공연된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은 조선 왕실의 행차 음악인 ‘행악’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였어요. 정악의 한 갈래인 ‘행악’은 왕의 나들이나 사신 행렬이 있을 때 연주되던 음악을 말하지요.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는 음악이기도 합니다. 보허자는 대표적인 행악 곡 중 하나였습니다.
보허자는 오랜 기간 기악곡으로 연주됐는데, 여기에 다시 노래 가사를 붙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정조대왕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예요. 1829년 대리청정(왕을 대신해 국정을 맡는 것)을 하던 효명세자가 부왕 순조의 생일을 맞아 직접 시를 지었는데요. 총 3장으로 구성된 ‘보허자’의 1장과 2장 선율에 맞춰 시를 읊으면서 노랫말이 된 거지요.
효명세자는 어려서부터 시 짓기에 관심이 많았으며, 실제로 문학 재능도 뛰어나 많은 한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한데요.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며 궁중 음악과 무용의 발전을 주도하기도 했지요. 효명세자가 남긴 한시 350편은 기록적 가치와 함께 예술적 가치도 갖고 있어요. 이번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에선 기존에 가사가 없던 보허자의 3장에 새로 가사를 넣었어요. 효명세자와 정약용, 김정희의 한시까지 총 400여 편을 인공지능(AI)에 학습시킨 뒤 이를 바탕으로 보허자의 3장에 새 노랫말을 붙여 대규모 합창 공연으로 연출한 것이지요.
“가는 바람은 단장을 스치고, 온화한 봄기운이 드물지 않구나. 연기를 머금은 해가 새롭게 떠오르고, 아아, 천하가 모두 복 받으리.” AI가 효명세자의 한시를 학습해 새로 만든 가사가 그럴듯한가요?
조선 ‘계유정난’ 재해석했죠
국립창극단의 ‘보허자’(20일 종료)는 조선 시대 ‘보허자’를 창극으로 재창작한 작품입니다. 창극은 민중 사이에서 형성된 음악으로, 여러 명의 창자(唱者)가 배역을 나눠 연기하며 판소리 창법으로 노래하는 것을 말해요.
이 작품은 행악 ‘보허자’보다는 ‘허공을 걷는 자’라는 말의 의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답니다. 창극 ‘보허자’는 조선의 7대 왕 세조로 등극하는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하는데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를 중심으로, 마치 공중에 발을 내딛는 듯한 찰나 같은 인생의 허망함을 표현한 작품이지요.
1453년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12세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기 위해 주요 신하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를 계유정난이라고 하지요. 당시 단종의 보좌 세력인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 명의 신하가 살해되거나 먼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수양대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위협 세력으로 여겨진 동생 안평대군한테도 사약을 내리고 1455년 마침내 왕위에 오르지요.
창극 ‘보허자’는 계유정난이 벌어진 지 27년이 지난 1480년(성종 11년)을 배경으로 삼아요. ‘보허자’의 극본을 맡은 배삼식 작가는 무덤이나 비문 등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역사 속에서 지워진 안평대군에 주목했다고 해요. 작품에서 안평대군은 실제와 달리 죽지 않고 온 세상을 떠도는 허름한 차림의 나그네로 등장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입힌 거죠. 그리고 작품에서 수양대군은 죽은 뒤 안평대군의 눈에만 보이는 혼령으로 등장합니다.
실제 안평대군은 서예가이자 시인일 정도로 예술에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의 모습을 화가 안견에게 얘기해 그리게 하는데, 이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원(복숭아밭)을 그린 것으로, 아름다운 자연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요.
창극 ‘보허자’에는 실제 인물인 안평대군과 수양대군, 안견 외에도 다양한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아버지 안평대군이 몰락한 이후 노비 신세로 전락했다가 돌아온 딸 ‘무심’, 안평대군의 첩이었으나 관노비가 된 ‘대어향’ 등이 안평의 꿈이 담긴 ‘몽유도원도’를 찾아 떠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