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도 중서부의 마하라슈트라주에서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이 “무굴제국의 유적을 없애라”며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이들은 인도 무굴제국의 6대 황제였던 아우랑제브의 무덤을 철거하라며 그를 상징하는 모형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1526년 세워진 무굴제국은 1858년 영국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인도 대부분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던 이슬람 왕조입니다. 이번에 힌두교 시위대가 아우랑제브 황제를 겨냥한 이유는 그가 비이슬람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죠. 과거 무굴제국은 왜 힌두교도들을 차별했던 걸까요? 오늘은 과거 인도에서 무굴제국이 어떤 나라였는지 알아볼게요.
칭기즈 칸의 후손이 세운 제국
무굴제국의 창시자이자 초대 황제인 바부르(1483~1530)는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후손이었어요. ‘무굴’이라는 이름은 ‘몽골’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바부르는 페르가나(현재 우즈베키스탄 동부) 지역의 통치자였는데, 그는 티무르가 중앙아시아에 건설했던 대제국을 다시 세우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 계획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정복 방향을 남쪽으로 돌리게 됩니다.
16세기 초부터 여러 차례 북인도를 침공했던 바부르는 1525년 본격적인 인도 원정에 나섰어요. 이듬해인 1526년엔 당시 북인도를 통치하고 있던 로디 왕조를 무너뜨리고 무굴제국을 건국했지요. 이후 바부르는 카불(현재 아프가니스탄 수도)과 인도의 아그라를 이으며 제국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종교 관용 정책을 실시하다
무굴제국은 바부르의 후계자들에 의해 점차 체계를 갖춰갑니다. 그중에서도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이룬 3대 황제 아크바르(1542~1605)는 바부르를 능가하는 영웅으로 평가받으며 ‘대제’라는 칭호로 불리죠. 그는 남부 데칸고원을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정복하고, 안정적인 제국 통치를 위한 제도 개혁에 나섰죠.
무엇보다 아크바르가 ‘대제’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종교 관용 정책이었어요. 초대 황제 바부르 시기부터도 힌두교를 비롯한 토착 종교에 대한 일정 수준의 관용은 있었지만, 힌두교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지즈야’라는 세금을 별도로 내야 했어요. 개종을 종용받는 분위기도 존재했지요. 인도는 무굴제국 시기부터 지금까지 전체 인구의 약 80%가 힌두교도로 추정됩니다.
16세기엔 서구와의 교류가 확대되며 인도 내 기독교도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어요. 이러한 종교적 구도 속에서 아크바르는 종교 간 갈등을 완화하고 모든 신앙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어요. 그는 힌두교도를 행정 및 군사 조직에 적극 등용했으며,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던 세금도 폐지했죠. 아크바르는 무슬림으로 개종한 이들에겐 정치적으로 무슬림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정책을 시행해 자발적인 개종을 유도했습니다.
이슬람교 내세운 ‘정복 군주’
하지만 샤 자한(1592~1666) 황제 통치 시기부터 무굴제국의 종교 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샤 자한은 이슬람 율법을 제국 통치의 기준으로 삼아 무굴제국의 제국적 정체성을 강화하려고 했어요. 그는 일부 힌두교 사원을 철거하고, 이슬람 예배를 장려했어요.
이슬람적 미학을 내세운 건축물도 이 시기에 대거 세워졌습니다. 무굴제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타지마할’도 샤 자한 황제의 작품이에요. 타지마할은 그가 사랑하던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 사망하자 그녀를 기리기 위해 지은 거대한 궁전 형태의 무덤이에요. 공사 기간만 20년이 넘게 걸렸고 인부 또한 수만 명이 동원됐습니다. 궁전을 꾸민 보석들은 미얀마, 중국 등 해외에서 수입했고, 튀르키예 등 여러 지역에서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참여했죠. 샤 자한은 죽은 후 뭄타즈 마할과 함께 타지마할 지하에 안장됐답니다.
샤 자한 사후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1618~1707)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무굴제국도 중대한 변화를 맞습니다. 그는 정복 군주로서 이름을 떨쳤어요. 인도 남부 데칸고원의 여러 이슬람 왕조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인도 대부분을 지배했습니다. 무굴제국 역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였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무굴제국은 아우랑제브 통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가혹한 종교 정책이었습니다.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서 이슬람 율법을 제국 통치의 중심 원칙으로 삼았어요. 이슬람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지지를 확보하고 정권을 정당화하려고 했죠. 그러면서 기존의 종교 관용 기조는 크게 약화됐습니다. 그는 비이슬람교도들에게 걷었던 인두세를 부활시키고, 일부 힌두 귀족들을 관직에서 제외하는 등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오랫동안 무굴제국에 협력해왔던 비이슬람 세력들이 반기를 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인도 중서부에 기반을 둔 마라타족의 반란은 아우랑제브를 궁지로 몰아넣었어요. 힌두교도가 다수인 마라타족은 1674년 힌두 국가인 마라타 왕국을 세웠고, 아우랑제브는 이들을 무력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죠. 이후 각 지역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나면서 무굴제국의 군사·재정적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어요.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제국은 사실상 해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무굴제국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해외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인도 내에서도 정치와 군사적 개입을 늘려갔어요. 19세기 초 영국은 인도 대부분 지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고, 무굴 황실까지 좌지우지하게 되었죠. 1857년 인도에선 영국에 맞선 반란(세포이 항쟁)이 벌어지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영국은 무굴제국을 해체하고 인도 전역을 합병했어요. 그렇게 무굴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