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엘과 체르니는 피아노를 포기하게 해준 고마운 인물이다? 후기 낭만주의 시대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금수저도, 은수저도 아닌 ‘음(音)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이 남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다. 김문경(48). 서울대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특허청 사무관으로 일하다 지금은 변리사로 활동 중인 그는 작곡가 말러를 깊이 파고들어 10년 전 두툼한 벽돌책 ‘구스타프 말러’ 3부작을 완성한 이색 음악 해설가다.
낮에는 국제특허법률사무소에서 발명가나 기업들이 출원한 특허의 가치를 꼼꼼히 살피고, 밤에는 자신이 손수 피아노를 쳐서 녹음한 말러 음반을 들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가 신간 ‘클래식 vs 클래식’(동녘)을 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첫 단락에서 ‘따다다다안’ 하고 두 번 울리는 리듬이 모스부호로는 알파벳 V에 해당한다' '피아노 초심자 교본 ‘바이엘’은 1851년 독일 피아니스트 페르디난트 바이어가 작곡한 모음집으로, 멜로디가 ‘도레미파솔’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고 흰 건반만 계속 두드려 검은 건반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심어준다' ‘아버지가 바이에른 궁정 오페라 극장의 호른 수석주자였던 슈트라우스는 어릴 때 이미 조숙한 작곡 실력을 뽐냈으니 음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등으로 설명해 초심자는 친숙하게, 애호가는 흥미롭게 클래식에 다가갈 수 있다.
쇼팽의 ‘녹턴’과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처럼 꼭지마다 서로 다른 작곡가의 대표 곡 2개를 맞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물냉 대 비냉’ 전략”이라며 “목이 탈 땐 무조건 물냉이고, 짜릿하게 먹고 싶을 땐 비냉인 것처럼 냉면이란 본질은 같되 맛은 다른 둘을 묶어서 둘 다 좋아하게끔 만들려는 의도”라고 했다. “저는 평소에도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의 인생으로 살고 있거든요, 하하!”
어릴 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 1악장을 듣곤 “날벼락을 맞는 느낌이었다”. 중학생 때 라디오에서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을 들은 이후론 말러 열병에 빠졌다. 말러의 교향곡 악보를 모으기 시작했고, 음반과 악보를 대조해가며 작품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서울대 약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2000년대 중반 그는 말러의 젊은 시절 삶과 빈 시절, 교향곡을 해부한 책을 냈다.
국내에서 말러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로 꼽힌다. 그러나 너무 오랜 사랑에 물린 걸까. 그는 “공연장에서 실연으로 들어야 진가를 알 수 있는 말러는 지금 같은 코로나 시대엔 안 맞는 작곡가. 나 또한 말러와 잠시 이별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로 일과 수입이 모두 끊기면서 처음으로 음악한테 버림받는다는 느낌을 받았죠.”
지독한 허탈감을 느꼈다. “온라인 비대면 해설을 하는데 객석이 텅 비어서 유령한테 떠드는 느낌이었어요.” 본업인 변리사 활동에 집중했다. 의외로 잘 맞았다. 예전엔 ‘김문경? 음악 해설 잘하지!’란 말을 듣는 게 꿈이었다. 지금은 ‘변리사로서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꿈이다. “너무 현실적인가요?”라고 되물은 그는 “음악 해설가로선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도 서 봤고, 부산·대구·대전·광주의 주요 공연장도 섭렵했다. 더 바라는 게 욕심”이라고 했다.
본래 전공을 살려 약사로도 일할 계획이 있다. “약과 음악은 분리된 분야가 아니니까요. 글자 풀이부터 하면 ‘약(藥)’에서 ‘풀(草)’을 뗀 것이 ‘악(樂)’이에요. 약은 육신을, 음악은 영혼을 다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