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의 큰 키에 10㎝가 넘는 구두를 신고 꼿꼿하게 모델 워킹을 하던 엄미숙(68)씨가 거울을 보며 몇 번이고 자세를 교정했다. “방금 또 어깨 들었죠?” 엄씨는 오는 5일 ‘2022 가을·겨울 파리 패션위크’ 김보민 디자이너 쇼에 서는 최고령 모델이다. 세계 유명 디자이너, 모델들이 대거 참가하는 파리 패션위크는 뉴욕·런던·밀라노와 함께 세계 4대 패션쇼로 꼽힌다.

‘2022 가을·겨울 파리 패션위크’블루템버린 김보민 디자이너 쇼에 서는 시니어 모델 엄미숙(오른쪽)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한 연습실에서 모델 주명소씨와 함께 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엄씨는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한 연습실에서 수백 번 고치고 또 고쳐 걸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모델은 ‘롤 모델’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날씬한 몸매가 다가 아니죠. 건강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극을 주고 싶어요.”

엄씨가 모델로 무대에 선 건 2년이 채 안 됐다. 그는 대학교수(한성대 영문학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2019년 8월에 퇴직했다. 퇴직 후 어린 시절 꿈만 꿨던 모델 일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모델이나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전기도 안 들어오는 경기도 오산 시골 출신인 저는 엄두를 못 냈어요.” 그는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 일을 하면서 영문학을 다시 공부해 교수가 됐다. “학생들에게 영문 드라마를 가르치면서도 ‘아, 내가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했죠.”

2019년 말, 동네 문화센터에 개설된 시니어 모델반을 찾아 무작정 등록했다. 한 달쯤 워킹을 배웠을 때 한국모델협회가 주최하는 시니어 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사에게 “대회 나가고 싶다”고 했더니 “에이, 바라볼 걸 바라봐야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기가 생겼다. “참가비가 1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구경 해도 1만원은 드는데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몰래 신청서를 넣었어요.” 처음 나간 대회에서 덜컥 ‘톱 10′에 들었다.

그 이후 자신감이 붙어 워킹 연습에 매진했고, 2020년 각종 시니어 모델 대회에서 줄줄이 입상했다. ‘사랑해요대한민국한복대회’ 선, 앙드레김 대회 3위, 월드탑스포츠모델 대회 4위 등이었다. 이후 패션 브랜드 블루템버린 김보민 디자이너와 인연이 닿아 이번 파리 패션위크 런웨이에 서게 됐다.

식단 관리도 철저히 한다. 기름기 있는 음식과 탄수화물은 거의 먹지 않는다. 단백질 위주 식사를 주로 하는데, 돼지고기를 쪄 먹거나 물기를 짠 두부와 계란을 볶아 먹으면 훌륭한 다이어트식이 된다고 했다. 하루 한 시간 반씩 근력 운동, 유산소 운동도 빼놓지 않는다.

엄씨 남편은 국정원 1차장, 캐나다 대사를 지낸 남주홍(70) 경기대 석좌교수다. 엄씨는 “조선일보 덕분에 결혼했다”고 귀띔했다. 엄씨가 연세대 영문과 석사과정에 다닐 때 1978년 10월 31일 자 조선일보 ‘젊은이 발언’ 코너에 ‘기성을 뒤쫓기만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는데, 영국 유학 중이던 남 교수가 팬레터를 보낸 것이다. 2년간 사진과 편지를 교환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요새 남편은 저의 1호 팬이에요. 대회 나가면 런웨이 아래서 ‘엄미숙! 엄미숙!’을 외쳐줍니다” 엄씨는 “솔직히 제 나이에 파리 패션위크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며 “실수 없이 쇼를 잘 마무리해서 다른 시니어 모델들도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