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서울 중구 서울남산국악당에서 민혜성(맨 앞) 명창과 제자 가향스 가샤르(뒷줄 왼쪽부터), 안나 예이츠, 빅토린 블라보가 합죽선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들은 오는 4일 이곳에서 ‘마이 판소리’ 공연을 펼친다. /남강호 기자

“인생 백년 꿈과 같네, 날 적에 우는 것은 살기를 걱정해서 우는 것이요. 갈 적에 우는 것은 내 인생을 못 잊고 가는 것이 서러 운다.”

31일 오전 서울남산국악당. 안나 예이츠(34, 독일·영국)가 북 장단에 맞춰 판소리 단가 ‘인생백년’ 곡조를 뽑았다. 시원하게 시작된 노래가 흐느끼듯 부르는 부분에 들어서자 듣는 이들 눈가가 촉촉해졌다. 가향스 가샤르(27·프랑스)와 빅토린 블라보(39·프랑스)가 추임새를 넣었다.

이들은 유럽 출신 한국 판소리꾼. 수년 전 판소리를 배우고 싶어 한국에 왔다가, 이제는 한 해에 십여 회 넘게 공연하는 소리꾼이 됐다. 오는 4일 판소리 스승인 민혜성(51)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과 함께 오르는 ‘마이 판소리’ 공연을 앞두고 이날 맹연습 중이었다. 민혜성 명창은 “눈을 감고 선입견 없이 들으면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라며 “배운 시간은 짧지만 이들의 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많다”고 했다.

외국인 소리꾼 3인은 처음 판소리를 듣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봤다”고 했다. 파리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었던 가샤르는 2015년 판소리를 듣고 “낮은음에서 고음으로 다시 저음으로 수시로 바뀌는 역동성과 동물의 소리까지 표현하는 판소리 공연을 보고 완전히 매료됐다”고 했다. 그는 “한복의 선이 판소리와 어울려 마치 물과 슬픔과 파도가 함께 출렁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가스펠 음악을 했던 블라보는 “판소리에는 걸 크러시부터 악당 이야기까지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의 에피소드들이 담겨있다”며 “‘흥보 마누라’가 나와 놀보에게 후련하게 해주고 싶은 말을 해주는 장면은 최고의 ‘걸 크러시’”라고 말했다.

언어 장벽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이들의 악보엔 쉬어야 하는 곳, 단어의 의미 등이 빼곡하게 필기돼 있다. 가샤르는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서 부르고 싶어 많은 노력을 했다”며 “춘향가에서 도련님이 춘향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신비한 감정이었을지, 얼마나 그녀를 알고 싶었을지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국 문화 연구자이기도 하다. 문화적 배경을 통해 음악을 연구하는 인류음악학 전공자인 예이츠는 2014년 한국에 와 판소리를 배우면서 판소리 논문으로 런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20년부터 서울대 국악과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샤르는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최근 17세기 조선 후기 관련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불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블라보는 앞으로 판소리의 음률과 생생함을 살려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이 목표다.

2007년부터 정기적으로 프랑스와 벨기에 등에서 판소리 강연을 열고 있는 스승 민혜성 명창은 “현지에서 수강생들을 보면 K팝은 몰라도 판소리가 좋아 찾아온 경우도 많다”며 “한국 문화에 K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국경을 넘어 많은 소리꾼들과 함께 전통을 지켜가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