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식 한국장애인IT복지협회 회장.
이범식 한국장애인IT복지협회 회장.

이범식(61) 한국장애인IT복지협회 회장은 전기기사로 일하던 1985년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잃었다. 2만2900볼트의 고압 전류가 몸에 흘렀고, 깨어나자마자 “양팔을 절단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 뒤에는 감염이 심해져 오른쪽 다리도 잘라냈다. 이 회장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보다, 당장 화장실은 어떻게 갈지가 더 큰 고민이었다”며 “일보다 생리 현상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절실한 문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 회장의 인생을 바꾼 건 컴퓨터다. 1991년 경북 경산의 거리를 지나다 매장에 진열된 컴퓨터를 보고 ‘발가락으로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컴퓨터 학원에 찾아갔고, 사정을 들은 원장은 수업이 끝난 뒤 무료로 강습을 해줬다. 이 회장은 매일 출석해 발로 키보드 치는 법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1995년에는 컴퓨터 조립·판매 매장을 차렸지만, IMF 사태로 2년 만에 접었다.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회장은 “삶을 버티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며 “무너지는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버틸 힘은 남겨둬야 하더라”라고 했다.

이 회장은 2013년 대구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장애인 직업 재활’. 이 회장은 “제 인생이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더 해서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직업을 찾아주고 싶었다”고 했다. 발가락에 연필을 끼워 필기해가며 11년 만에 박사 학위를 땄다. 지금은 직업 재활 전문가로 강단에 서고, 60여 기관·단체에서 장애인식 개선 교육과 재활 특강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서울에서 경산까지 462㎞를 걸어서 종주했다. 왼발 하나로 65만9000걸음을 걸었다. 이 회장은 “양팔이 없고, 오른발은 의족을 끼고, 왼발 하나로 버티며 살아가는 제가 도전을 통해 뭔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장애도 관점을 바꾸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될 수 있다”며 “김창옥씨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씨앗을 뿌리는 강연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병길 강원도지제장애인협회 홍천군지회 부지회장.

이병길(69) 강원도지체장애인협회 홍천군지회 부지회장은 ‘휠체어를 탄 기부 천사’로 불린다. 기초생활수급비·장애인수당·기초연금 등 한 달 100만원 남짓의 수입 가운데 아끼고 아껴 매달 50만원을 기부한다. 생활 수기 공모, 장애인 수영대회나 기능대회에도 도전해 상금이 생기면 빠짐없이 기부한다. 그렇게 26년간 총 1억5000만원을 주변에 나눴다.

이 부지회장은 태어날 때부터 희소 난치성 질환인 혈우병을 앓았다. 양치만 해도 잇몸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작은 상처가 나도 수혈이 필요했다. 어머니에게 업혀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는 3개월 정도 다니다 병이 악화돼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졌다. 5년에 걸쳐 어렵게 졸업장을 받았다. 어렸을 땐 소아마비라는 소견을 듣기도 했는데, 혈우병 진단을 받은 것은 28세 때였다. 외부 활동이 어려웠던 이 부지회장은 라디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20~30대를 보냈다. 그때 받은 원고료가 기부의 씨앗이 됐다는 게 이 부지회장의 말이다. 이 부지회장은 지금도 저소득 장애인과 독거노인, 혈우병 환자들을 위해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 자원봉사도 1200회에 걸쳐 4300시간 이상 했다. 이 부지회장은 “저는 특별한 걸 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저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 조금 더 아끼고 살아갈 뿐”이라며 “저에게 기부와 봉사는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삶의 의미이자 희망”이라고 했다.

발달장애 미술작가 이다래씨.

미술 작가인 이다래(31)씨는 네 살 무렵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돌 무렵부터 어렸을 때부터 종이와 색연필을 갖고 놀던 그녀는 스케치북 열 권을 일주일에 채울 만큼 그림에 몰입했다. 다래씨가 어엿한 미술 작가가 되는 데는 어머니 문성자(70)씨의 헌신이 있었다. 문씨는 “어렸을 적 다래가 기린을 그리겠다고 해 생물도감을 갖다주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반드시 직접 봐야만 그림이 나왔다”며 “그래서 서울대공원에 수도 없이 데려갔다”고 했다. 문씨는 서울대공원을 오가는 길에 수도 없이 울었다고 했지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랑과 인내, 헌신이 한 사람의 작가를 키워낸 것이다.

다래씨는 2015년 백석예술대 회화과에 일반전형으로 들어갔다. 한 해 전인 2014년에는 미대 입시에서 면접관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해 낙방했다. 문씨가 스무 가지 예상 질문을 정리해 언어치료사에게 전달했고, 1년간 집중적으로 연습한 끝에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수업 내내 문씨가 곁에 있어야 했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런 다래씨를 보고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너희가 사회에 나가서 다래만큼만 하면, 뭘 하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9차례의 개인전을 열고 200차례의 단체전에 참가한 다래씨는 하나은행 소속 미술 작가로 활동 중이다. 집에서는 아이패드로, 작업실에서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지난해에만 35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타인을 위한 봉사도 꾸준히 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연탄 봉사를 다녔던 게 시작이다. 부친 이현석(70)씨는 “장애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병길·이다래·이범식씨는 18일 열린 제45회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았다. 또 ‘장애인 한의사’로 알려진 강병령(63)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정책부회장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등 총 18명이 정부 포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