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전남 구례군 산동면 반곡마을에서 나들이객들이 봄을 알리는 샛노란 꽃을 피운 산수유 군락지 사이를 산책하고 있다. 산수유 고장으로 불리는 구례에는 산수유나무가 10만8000여 그루 심어져 있다. 가을에는 전국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산수유 열매를 수확한다. /김영근 기자

지난 16일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은 온통 ‘노란 봄빛’으로 일렁였다. 지리산 자락에 옹기종기 모인 산동면 49개 마을은 전국 최대 산수유 군락지를 품고 있어 ‘산수유 마을’로 불린다. 이 중 계척·현천·반곡·상위·하위 5개 마을에 산수유가 밀집해 있다. 논밭을 제외한 산비탈이며 얕은 산등성이, 돌담 주변, 바위 틈, 마을 어귀 공터, 개울가 등 자투리 땅에는 어김없이 산수유가 심겨 있었다. 한기가 채 물러가지 않은 초봄, 가장 먼저 ‘샛노란 봄’이 내려앉는 동네가 산수유 마을이다. 산동면 좌사리 산수유 사랑공원 언덕에 오르자 노란 산수유 꽃이 상관·평촌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구례군은 이달 중순 개최하려던 산수유 봄 축제를 취소했다. 코로나 탓에 2020년부터 3년 연속 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산수유 꽃의 향연(饗宴)을 만끽하려는 행락객 발길이 이어진다. 전북 전주에서 온 최태만(54)씨는 “겨울을 깨우는 첫 색은 아마 노랑이 아닐까 싶다”며 “노란 꽃 물결을 보니 그간 코로나로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다”고 말했다.

◇전국 생산량 70% 구례 산수유

전국에서 가장 먼저 노란 봄이 흐르는 구례는 산수유 고장이다. 산수유는 봄엔 노란 꽃을, 가을엔 빨간 열매를 내놓는다.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나무가 산수유다. 동백이나 매화가 산수유보다 더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지만, 겨울꽃의 느낌이 강하다. 산수유는 개나리·진달래·벚나무·철쭉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운다. 산수유는 ‘겨울과 봄의 획을 긋는 나무’이자 ‘봄의 전령사(傳令使)’로 통한다. 조경수로도 좋지만 한약재와 건강 식품 재료로 사용하는 열매를 얻으려 많이 키운다.

가을철에 빨갛게 익는 산수유 열매. /구례군

산수유는 지름 0.8㎝ 작은 꽃봉오리에서 20~30개 꽃송이가 둥글게 모여 피어난다. 다 자란 나무 높이는 약 7m다.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열매는 10~11월 빨갛게 익는다. 산수유는 오미자⋅구기자와 함께 ‘3대 약용 열매’로 꼽힌다. 수확한 열매는 분리기로 씨앗을 제거하고 건조 과정을 거친다. 과거에는 씨앗 제거를 수작업에 의지했으나 1990년대부터 씨앗 제거 분리기가 보급됐다.

구례군의 1개읍·7개면 중 최북단 산동면에 구례 지역의 산수유 90%가 분포한다. 자생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주민이 100여 년 전부터 열매를 얻으려고 심었다. 산동면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지역이라 경작지가 부족했다. 주민들은 좁은 논과 밭으로는 생계 유지가 여의치 않자, 집 주변 빈 땅에 산수유를 심기 시작했다. 경작지 부족이 지금의 독특한 산수유 마을 풍경을 만든 것이다.

구례 전체의 산수유 분포 면적은 축구장 335개 크기의 276만㎡에 달한다. 전체 산수유는 10만8057그루로 30~50년생이 많다. 수령이 100년이 넘은 나무도 2000여 그루에 달한다. 709개 농가가 가을이면 말린 산수유 열매 300t(전국 생산량의 70%)을 수확해 연간 약 45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김인호 구례군 홍보계장은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산수유 세 그루면 자녀를 대학 보낸다고 해서 ‘대학 나무’로 불렸다”고 말했다.

주민 고령화로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10여 년 전 50년 이상 된 고목 산수유 500여 그루가 외지로 팔려 비상이 걸렸다. 일부 주민이 수작업에 의지하는 산수유 농사에 어려움을 겪자 다른 지역 조경업자에게 산수유를 판 것이다. 이에 군은 지역 특산물을 지키기 위해 수령 50년 이상 산수유 반출을 금지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또 고목 소유 농가에 나무 관리비와 열매 수확 기계 등을 지원했다.

◇1999년부터 시작한 산수유 축제

산수유 마을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정지숙 구례농업기술센터 농업연구사는 “산동면 산수유 마을 역사는 1000년이 넘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수유 나무는 산동면 계척마을에 있다. 높이 7m·둘레 4.8m로 수령은 1000년으로 추정된다. 2001년 2월 군 보호수로 지정됐다. ‘1000년 나무’를 통해 전국 각지로 산수유가 보급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할머니 나무’로 부른다. 구례군은 2년 전 ‘1000년 나무’ 종자를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종자 영구 저장 시설 ‘씨앗 금고’에 저장했다.

2014년에는 산동 고유의 산수유 농사가 정부가 보전 가치를 인정하는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구례군은 유엔식량농업기구(UNFAO)가 관리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 지정을 추진 중이다.

구례군은 산수유 산업 육성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산수유 가공식품 원료 표준화와 기능성 향상 식품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구례농업기술센터는 산수유를 활용한 초콜릿·머핀·식혜·막걸리·강정·환 등 다양한 가공식품을 개발했다. 1999년부터는 매년 3월 산수유 축제를 해 관광객들도 끌어모았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곧바로 축제를 재개할 예정이다.

김순호 구례군수는 “구례 산수유는 지리산이 준 선물이자 선조의 유산”이라며 “산수유 농사는 가난한 산촌에서 농민들이 삶을 유지해 온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