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11시 1분쯤 전북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에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민희(39) 주무관이 전화를 받자, 중년 남성은 “성산교회 오르막길 노란색 다솔어린이집 유치원 차 뒷바퀴에 상자를 두었습니다. 어려운 분들을 위해 써주세요”라는 말만 짧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오 주무관은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난 것을 직감하고 이 사실을 직원들에게 알렸다.
직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3~4분을 뛰어 현장에 도착하니 전화 내용대로 A4 용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인쇄된 편지 1장과 5만원권 다발 15개, 동전이 가득 든 빨간 돼지저금통 1개가 들어 있었다. 금액은 7600만5580원이었다. 편지에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하는 전주 학생들과 소년소녀가장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힘내시고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올해 세밑에도 어김없이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났다. 2000년 4월 이후 23년째 선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난해 이맘때도 7009만4960원을 기부했다. 올해까지 누적된 성금은 8억8473만3690원에 달한다. 전주시는 “직업도 얼굴도 알 수 없어 이 남성을 ‘얼굴 없는 천사’라고 부른다”며 “성금은 사랑의 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역 학생 장학금과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계층을 위해 사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주시는 그동안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을 현금 또는 연탄·쌀로 바꿔 생활이 어려운 6578가구에 전달했다. 2017년부터는 노송동 저소득 가정 초·중·고교 자녀 20명에게 해마다 천사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전주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연말을 맞아 익명의 기부 천사들의 온정이 이어지고 있다. 2017년부터 매년 연말마다 익명 기부를 해온 경남 지역의 ‘기부 산타’는 지난 22일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입구에 신문지로 싼 성금을 두고 갔다. 지폐와 동전 4749만4810원이었다. 손편지에는 “병원비로 힘겨워하는 가정의 중증 병을 앓는 청소년·아동 의료비로 사용되길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기부 산타는 경북·강원 산불 발생 등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성금을 보내 5년간 40여 차례에 걸쳐 총 5억4500만원을 기부했다.
5톤 트럭 가득 라면을 채워 기부한 천사도 있었다. 익명의 기부자는 이달 초 부산 사상구 모라3동 행정복지센터 앞으로 1000만원 상당의 라면 550박스를 트럭에 실어 보내면서 “추운 겨울을 힘들게 보내는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모라3동 행정복지센터 관계자는 “경기 악화로 후원이 줄어든 상황에서 이런 기부는 취약 계층에게 단비와 같다”고 말했다. 우범기 전주시장은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익명으로 후원하는 시민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