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차를 60개월 할부로 구입해주면 2000만원을 드립니다. 할부금도 대신 내드려요.”
지난해 9월 A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 B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신형으로 뽑은 외제차를 중동과 동남아 국가에 중고차로 수출하면 무관세 혜택으로 비싼 값에 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감도장과 신분증 등 명의를 빌려주면 2000만원을 챙겨주고, 60개월 할부금 전액도 대납해주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B씨는 한 무역회사가 발행한 당좌수표를 보여주며 A씨를 안심시켰다. B씨가 내세운 무역회사가 첫 달 할부금 480만원을 대신 내주고, 최대 5개월치 할부금을 대납해 주자, A씨는 결국 자신의 명의로 외제차를 구입했다.
B씨 일당은 모집책 3명을 고용해 범행 대상자들을 물색했다. 지난해 9월부터 지난 2월 말까지 7개월 동안 ‘외제차 사기단’에 속아 120여 명이 외제차를 구입했다. 피해자들은 70대 노인부터 20대 대학생, 주부 등 다양했다.
피해자들은 주로 모집책과 평소 알고 지낸 지인으로, 동네 주민과 학교 선후배 등으로 연결됐다. 이미 명의를 빌려준 이가 자신의 지인을 소개하기도 해 피해자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된 경우도 많았다. ‘외제차 사기단’은 한 달에 한 번꼴로 피해자들을 모아 계 모임 성격의 만남을 가지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교도소 수감 생활하면서 ‘외제차 사기’ 모의
‘외제차 사기단’에 속아 차량을 구입한 C씨는 해외 수출을 위해 인천항이나 부산항에 있어야 할 자신 명의 외제차가 지난해 12월 서울의 한 호텔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가 운전자 간 주차 시비와 폭행 사건의 대상이 됐다는 관할 경찰서 통보를 받으면서 의심을 품게 됐다.
피해자 C씨는 “무역회사에서 매달 400만원이 넘는 할부금을 수개월 동안 대신 내줬고, 은행이 지급을 담보하는 당좌수표까지 보여주면서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수출을 앞둔 내 차량이 경기도에서 교통사고가 난 것을 계기로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피해자는 지난 2월 말 사기단이 내세운 무역회사가 부도 처리된 소식을 듣고서야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 피해자들은 제주시 자동차등록사무소에 찾아가서 차량 운행 정지를 신청했다. 제주시는 140대가 넘는 차량에 대해 전국 지자체와 경찰서에 운행 정지 요청 사실을 통보한 상태다.
수사에 나선 제주경찰청은 현재까지 ‘외제차 사기단’ 주범인 총책 D(48)씨와 피해자를 모집한 B(49)씨, 무역회사 대표 E(24)씨를 구속했다. 이들은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하면서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D씨는 피해자들에게 가명을 사용해왔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두 달 넘게 도망 다니다 검거됐다. 경찰은 또 대포차 판매업자 F(32)씨를 구속하는 등 현재까지 모두 12명을 입건했다.
피해 차량 대수는 260여 대로, 피해액은 1대당 최소 4000만~5000만원에서 최고 1억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사기단은 피해 차량을 대포차 업체에 1대당 1000만~3000만원에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외제차 사기단’에 속아 은퇴 자금을 날리거나 가게 문을 닫은 피해자도 나왔다. 한 일가족 5명은 사기단에 속아 12억원에 이르는 피해를 떠안게 됐다.
◇대포 차량으로 둔갑, 피해 눈덩이
피해자들은 자신의 소유로 된 외제차를 말소시키고 지난해 말까지 외국에 수출해주겠다는 사기단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만, 이 외제차 중 일부는 대포차로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차량 1대당 1억원대 할부금과 이자를 매달 갚아야 하고, 보험료와 자동차세도 떠안게 되면서 피해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명의로 된 외제차를 실제 보지도 못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게다가 대포차로 거래된 일부 차량의 교통법규 위반 통지서를 받으며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명의로 된 외제차를 되찾기도 쉽지 않은 상태다. 현재 경찰이 회수한 피해 차량은 10여대에 그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수배 중이다.
자신의 차량이 대포차로 둔갑해 전국 각지에서 운행되면서 범칙금과 과태료 부과서가 날아오자, 피해자들은 GPS를 활용한 추적에 나섰다. 고급 외제차는 도난 방지를 위해 GPS가 부착돼 있다. 하지만 사기범들은 GPS를 제거해 자신들의 범행을 위한 별도의 GPS를 부착했다. 한 피해자는 사설 업체에 요청, 번호판을 조회해 다른 지방에서 운행 중인 외제차를 찾았으나, 다음날 사기범들이 자신들이 부착한 GPS로 역추적해 차량을 몰래 훔쳐가기도 했다.
이미 8000만원의 담보 대출을 받은 차에 대해 3000만원의 추가 담보 대출을 받은 사례도 확인됐다. 최근 인천에서 자신 명의의 차량 1대를 찾은 또 다른 피해자는 이 차량에 담보 3000만원이 추가로 설정돼 대출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피해 차량을 대포차로 사용하던 사람이 인천 지역 캐피탈 업체에 이 차를 맡기고, 3000만원의 담보 대출을 받아 갔다”며 “캐피탈 측은 3000만원을 지불해야 차를 내줄 수 있다는 입장인데, 8000만원에 또 3000만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답답해했다.
제주경찰청 관계자는 “소득이 없고 신용이 낮은 대학생과 주부들에 대해서도 고가 외제차에 대한 할부 대출과 보험 가입이 이뤄진 것을 볼 때 사기단 일당뿐 아니라 캐피탈 업체와 외제차 판매점, 보험회사 직원까지 사기에 관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