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도 더 된 서울 문래동 기계·금속 공단에 ‘2030세대’ 청년들이 부모의 가업을 잇기 위해 모이고 있다. 공장은 기름때가 묻고 낡았지만 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청년들이 문래동의 한 펌프 제조 공장에 모여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박상훈 기자

지난 5일 찾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기계·금속 공단.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니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50년은 더 된 듯 낡은 1층짜리 공장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덜덜덜’ 기계 돌리는 소리, ‘지이잉’ 쇠 깎는 소리가 들렸다.

1960년대에 생긴 문래동 기계·금속 공단은 한때 우리나라 산업화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다. 판금, 주물, 연마 등 다양한 분야 기술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 보니 “설계도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하지만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상당수 공장이 문을 닫거나 지방으로 이전했다. 공장이 떠난 자리에는 아파트나 식당, 카페 등이 들어섰다. 현재 운영 중인 공장은 1300여 곳이다. 1960년대 공단을 이끈 기술자들이 꿋꿋이 남아 작은 공장을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문래동 공단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5년 사이 ‘2030세대’ 청년들이 “기술을 배워 가업(家業)을 잇겠다”며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특급 호텔 요리사, 무역 회사 영업 사원, 대학 축구 선수, 행정학 석사 출신 등도 있다. 코로나로 취업이 어려워진 탓에 공업고를 졸업하고 문래동으로 와 아버지에게 실전 기술을 배우는 청년도 생겼다.

이 청년들은 2017년 ‘문래방아’란 모임도 만들었다. 물레방아처럼 열심히 기계를 돌리자는 뜻이라고 한다. 처음에 15명이었던 회원이 이제 24명으로 늘어났다. 특급 호텔 중식당 요리사 출신인 정동호(37)씨는 “일은 요리사보다 힘들지만 아버지가 문래동에서 지켜온 금속 가공 기술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수입도 월 300만~400만원으로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호텔관광학 공부를 하던 2010년 “일손이 부족하니 잠시만 도와달라”는 아버지 부탁을 받고 잠깐 귀국했다가 아예 공장 일을 이어받았다.

문래방아 모임의 막내인 강민호(24)씨는 처음부터 가업을 이어갈 생각으로 공업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병역을 마치자마자 문래동으로 왔다. 그는 “요즘 취업이 어려운 데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문래동에서 수십 년 쌓아온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무역 회사 영업 사원이었던 임윤섭(35)씨는 2018년 직장 선배가 갑자기 해고당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아 전문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문래동에서 공장을 하는 장인을 졸라 금속 가공 기술을 배웠고 이제 대표가 됐다. 임씨는 “여기서는 기술이 늘면서 점점 성장하는 기분이 들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모이면서 낙후한 문래동 공단의 분위기도 젊은 층에 맞게 바뀌고 있다. 공업용 칼이나 커피 그라인더의 분쇄 날 등을 만드는 이충규(30)씨는 지난해 공장 근처에 칵테일 바를 냈다. 낮에는 공장 일을 하고 밤에는 바에서 칵테일을 만든다. 그는 “공장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또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씨의 공장 한쪽에는 커다란 블루투스 스피커도 놓여 있다. 그는 “좀 힘들다 싶으면 힙합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일한다”고 했다.

정동호씨는 요즘 유행인 캠핑 용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는 “여기 동생들과 함께 문래동 브랜드를 단 예쁜 캠핑 용품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행정학 석사를 마친 김동명(32)씨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려 보일러 부품을 절삭 가공하는 일을 한다. 김씨는 “아버지가 문래동에서 쌓은 30년 아날로그 기술에 디지털을 접목하는 중”이라며 “컴퓨터보다 아버지의 눈대중이 정확할 때가 많아 깜짝 놀란다”고 했다.

이들은 요즘 기술 교육 프로그램 만들기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정동호씨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또래 청년들이 문래동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한다”며 “문래동과 청년이 상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등포구청도 낡은 공장 지역인 이곳을 청년들과 함께 새롭게 바꾸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영등포구 관계자는 “앞으로 문래동 2세인 청년들이 지역 방향을 결정할 주역이라고 생각한다”며 “빠른 시일 내에 청년들과 문래동의 미래를 논의할 자리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호권 영등포구청장은 “문래동은 우리나라 제조업의 뿌리”라며 “중소벤처기업부와 협의해 가업을 승계하는 청년들에게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