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등 동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6일 사흘째 계속되면서 산림 피해가 축구장 2만1091개 크기인 1만4764ha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2000년 강원 고성과 삼척 등 2만3794ha를 태운 동해안 산불 이후 가장 큰 피해 규모다. 지난 10년(2012~2021)간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 피해 면적을 모두 합친 1만871ha보다도 크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주택 323채를 비롯해 축사 비닐하우스 등 시설 490여 개가 불에 탔다. 정부는 이날 울진과 삼척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중대본은 이날 전국 산불 현장 7곳에 진화 인력 1만9000여 명과 헬기 106대 등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고 밝혔다. 군 병력 2291명도 투입했다. 하지만 산불 면적이 넓은 데다 건조한 날씨와 강풍 등으로 쉽게 진화를 하지 못했다.
울진·삼척 외에 강원 강릉·동해와 강원 영월, 경기 안산, 부산 금정, 대구 달성, 경남 산청 등 전국 7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해 소방 헬기 투입도 분산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날 오후 10시 기준 울진·삼척 현장의 진화율은 40%, 강원 동해·영월의 진화율은 50%다.
산림청에 따르면, 겨울 가뭄 등의 영향으로 올해 들어 지난 3일까지 발생한 산불은 모두 23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126건의 약 2배에 달했다.
중대본은 이번 산불로 4635가구 7330명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강원 동해시에서는 산불이 도심까지 내려와 주택 75채가 불에 타는 피해를 당했다. 일부 문화재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 강원도 기념물 13호인 동해시 어달산 봉수대 주변 잔디가 불에 타는 등 일부 소실됐다. 울진 사찰인 불영사에 보관 중이던 보물 ‘불연(불교 의례용 가마)’과 ‘영산회상도’ 등은 화재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곳곳에서 철도와 도로 통행도 차단됐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동해역을 오가는 KTX의 출발·도착역은 동해역에서 강릉역으로 변경됐다. 영동선 동해~강릉 구간 열차는 5일부터 6일 오후 1시까지 운행이 중단됐다. 동해고속도로 옥계 나들목부터 동해 나들목까지 14.9㎞ 구간은 5일부터 6일 오전까지 전면 통제됐다.
대피소 등에 머물고 있는 산불 지역 주민들은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있다. 울진군 봉평2리에 사는 엄연옥(85)씨는 지난 4일 저녁을 먹던 중 창문으로 뒷산에 번지는 산불을 목격했다. 엄씨는 “밥 먹다가 시뻘건 용암 같은 게 튀어나오길래 헐레벌떡 뛰어나왔다”며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소름이 끼쳐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울진국민체육센터 등 임시 대피소 16곳엔 엄씨 같은 산불 이재민 667명이 대피해 있다. 울진읍 정림2리에 사는 남계순(72)씨는 “하룻밤 사이 집도 축사도 모두 새까맣게 탔다”고 했다. ‘대피하라’는 울진군 공무원의 전화를 받고 깨어난 남씨는 아내 송병자(71)씨와 함께 귀중품도 챙기지 못하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남씨 부부는 우사(牛舍)에 있던 소 20마리를 풀어준 뒤 울진국민체육센터로 몸을 피했다. 산불은 40여 평쯤 되는 남씨의 2층 집과 우사를 모두 태웠다. 남씨는 “전쟁 중에 폭격을 맞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대형 산불을 겪었던 강원 강릉시 옥계면 주민들은 또다시 맞이한 산불에 불안감을 호소했다. 2019년 옥계면 산불 당시 등과 팔 등에 부상을 입은 함광식(58)씨는 “3년 전 산불이 집에 옮아붙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면서 “그때 생긴 트라우마 때문인지 지금도 불만 보면 놀란다”고 했다.
동해시 묵호동은 화마가 휩쓴 마을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불에 탄 주택들이 뼈대만 남아있었고, 일부 주택은 지붕이 내려앉아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지난 5일 옥계면에서 시작된 불은 강풍을 타고 4시간 만에 약 10㎞ 떨어진 동해시 도심까지 번지며 주택 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번 화마에 집을 잃은 이형국(50)씨는 “어릴 적 추억이 다 사라졌다”면서 “어떻게든 불을 꺼보려 했는데 밀려드는 불길을 이겨낼 수 없었다”고 했다.
주민들이 소방대원들과 함께 불길을 막는 모습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5일 경북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의 한 주택에선 뒷산에서 넘어오는 불길을 막으려 주민들이 양동이를 손에 쥐고 물을 퍼다 날랐다.
당국은 진화 작업과 함께 울진·삼척 산불의 원인도 조사 중이다. 산림청은 방범 카메라(CCTV)로 지난 4일 울진 산불의 최초 발화 지점인 두천리 한 야산 인근 도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전에 차량 3대가 지나간 것을 확인했다. 산림청 관계자는 “산림과학원에서 현장 조사를 했는데 발화 원인은 아직 정확히 나오지 않았다”면서도 “담뱃불도 가능성 있는 발화 요인 중 하나”라고 했다.
경찰은 이날 강릉 옥계와 동해시 산불을 낸 60대 남성 A씨를 구속했다. A씨는 지난 5일 토치를 이용해 강릉시 옥계면 자택과 빈집에 불을 질렀고, 이 불이 산림으로 옮아붙어 대형 산불로 번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체포 과정에서 “주민들이 나를 무시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울진=이승규 기자, 동해=정성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