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과 천연가스를 지속 가능한 녹색 분류 체계(Taxonomy·택소노미)에 포함하기로 한 유럽연합(EU) 결정에 제동이 걸렸다. 15일(한국 시각) 유럽의회 경제통화위원회와 환경보건식품안전위원회는 합동 회의를 열고 원전과 천연가스를 택소노미에 포함해선 안 된다는 결의안을 찬성 76표와 반대 62표, 기권 4표로 채택했다. 지난 2월 택소노미에 원전과 천연가스를 넣기로 한 EU 집행부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의원들은 결의안에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위해 원전과 천연가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두 에너지원은 택소노미 규정에 명시된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의 기준’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는 원전의 안정성과 친환경성을 입증한 유럽 전문가 집단의 연구 결과와 배치된다. EU 공동연구센터(JRC)는 집행위 의뢰로 ‘원자력 환경영향평가’를 수행하고 작년 3월 “원자력 에너지가 풍력·태양광 등 다른 에너지원보다 인체 및 환경에 큰 해를 초래한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결의안은 다음 달 첫 주에 열리는 EU 전체 회의에서 표결에 부친다. 유럽의회 의원 705명 중 절반 이상이 찬성하면 집행위는 택소노미안을 취소하거나 수정해서 다시 내야 한다. 반대가 더 많으면 원전과 천연가스가 들어간 택소노미를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택소노미는 세계 각국이 온실가스 감축과 탄소 중립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경제 활동을 분류한 목록이다. 친환경 기술과 산업에 더 많은 자금이 투입되게 물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원전을 ‘친환경 산업’으로 인정할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선다. 프랑스와 핀란드 등은 탄소 배출이 없고 안정적인 전력 생산이 가능한 원전을 지지한다. 반면 독일과 덴마크 등은 폐기물 처리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한다. 원전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원전을 공격하면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 게 이번 결의안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탈(脫)원전을 추진한 문재인 정부가 작년 말 원전을 빼고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와 액화천연가스(LNG)를 넣은 K택소노미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원전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8월까지 원전이 친환경 산업으로 분류되도록 K택소노미를 개정하겠다고 밝혔었다. 이에 따라 환경부는 4월부터 원전업계 및 전문가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수정안을 준비 중이다. EU 택소노미에서 원전이 제외되면 K택소노미 논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유럽의 결정이 1조유로(약 1333조원) 규모의 기후변화 대응 투자 예산(그린딜)을 좌우하는 만큼 전 세계 친환경 산업에 미치는 파급력도 크기 때문이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학과 교수는 “세계적으로 친환경 산업에 투자 수요가 몰리는 상황에서 택소노미에서 제외되는 산업은 자금 조달 시 채권 이율이 상대적으로 비싸지는 등 투자가 다소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만큼 재생에너지 역사가 길지 않고 태양광·풍력발전 시설을 급격하게 늘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K택소노미에서 원전을 제외하긴 어려울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에너지 믹스(mix·전원 구성)’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상황에서 원전을 배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 안팎에서도 “K택소노미는 한국적 상황에 맞게 구성해야 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여러 차례 ‘탄소 중립을 위해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조화롭게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한 장관은 15일 기자 간담회에서도 “원전은 에너지 믹스 차원에서 보는 게 바람직하다”며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확보 등을 전제 조건으로 원전을 녹색 에너지로 분류하겠다”고 밝혔다.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활동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어떤 산업 분야가 친환경 산업인지 분류하는 체계. 친환경 기술과 산업에 더 많은 자금이 투입되게 물길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