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바카(55)씨는 광목에 수놓고 바느질해 만든 독특한 동화책으로 주목받은 동화작가이자, 달걀지단으로 밥과 고명을 감싸고 김으로 띠처럼 묶은 뒤 꽃과 허브를 꽂은 ‘보자기 비빔밥’으로 서울 인사동 ‘꽃, 밥에 피다’를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에 소개될 만큼 유명한 음식점으로 만든 ‘밥 디자이너’(메뉴 개발자 겸 요리연구가)이다.
그런 그가 서울 활동을 접고 충남 부여로 내려 간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88년 된 고옥(古屋)을 고쳐 만든 민박집 겸 음식점 ‘유바카하우스’를 지난 20일 열었다. 왜 서울을 떠나 아는 이 없는 부여로 갔을까. 유바카씨를 유바카하우스에서 만났다.
―유바카가 본명은 아니죠?
“그럼요. 원래 이름은 유미리. 아름다울 미(美)에 다스릴 리(理).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너만의 문화를 꽃피우면서 살아라’는 말을 늘 하셨어요. 2010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딸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이제부터는 나 혼자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겠다 싶었어요. 그러려면 어떤 이름이 좋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 시골 길가에 난 풀을 우연히 뜯어 씹으니 입안이 화하면서 환기가 확 되는 거예요. ‘나도 이런 사람이 돼야겠다’ 했죠. 하지만 이름을 박하로 하긴 그렇고, 소리 나는 대로 ‘바카’라고 하니 괜찮더라고요.”
―미술이나 음식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으셨죠.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토요일 아버지가 일찍 퇴근하시면 농사일 나간 어머니 대신 제가 아버지의 점심상을 차려 드렸어요. 엄마가 아침에 끓여 놓은 된장찌개에 두부를 새로 썰어 넣어서 드렸죠. 엄마는 항상 두부를 네모나게 써는데, 저는 세모·동그라미로 오려봤어요. 아버지가 그걸 숟가락으로 뜨시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냐’며 폭풍 칭찬을 하시는 거예요. 그때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면 칭찬받을 거리가 되는구나’ 알게 됐죠.”
―음식은 어머니에게 배웠나요.
“어머니가 하시는 걸 어려서부터 봤어요. 엄마는 도시락을 6개 쌌어요. 아버지 것부터 네 자식 것까지. 엄마는 도시락에 담을 김치를 아침마다 새로 담가야 돼요. 저는 엄마를 도와 돌확에다가 생강, 마늘 이런 걸 갈았어요. 색감도 중시하셨어요. 겨울밤 고구마 삶아서 간식 먹을 때가 있잖아요. 추운데 묻어놓은 독에서 하얀 무 꺼내시고, 황금색 배추속 꺼내시고, 약간 탈색된 초록색 파 꺼내시고, 빨간 고추 꺼내 색감을 맞추셨어요. 음식 재료가 지닌 색감만으로 꾸며도 예쁘구나 은연중에 배웠던 모양이에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유바카씨는 유학 컨설턴트로 17년 일했다. 서울 강남으로 스카우트될 정도로 인정도 받았다. “외국 학교를 직접 방문해서 학교와 주변 사진을 파노라마식으로 찍어서 부모님들에게 보여드리며 상담하니까 너무너무 신뢰하더라고요. 하지만 2000년대 초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내가 필요 없겠다’ 싶더라고요.”
유학 컨설턴트를 그만둔 유바카씨는 서울 북촌에 있는 한 한옥호텔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매니저로도 인정받으셨죠.
“몸이 많이 아프신 분이 호텔 전체를 쓰겠다며 투숙하셨어요. 무속인(巫俗人)인데 사람을 보면 벌어질 일이 보여 괴롭다며 사람을 절대 만나지 않고 싶다고 했어요. 저 혼자 그분을 돌봤어요.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니 은행잎이 떨어진 것도, 노랗게 색이 물든 것도 모른다는 게 안쓰러웠어요. 출근하면서 노란 은행잎 떨어진 걸 주워서 차곡차곡 쌓아 컵에 담아서 ‘이렇게 은행잎이 물들어 있다’고 하면서 드렸더니 너무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 씀씀이가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게 한옥호텔에서 3년을 일하다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 내 공간에서 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왔다. 서울 동숭동 낙산공원 근처에 ‘색동초가’란 이름의 공방을 열고 광목 동화책을 만들었다.
―어떻게 광목으로 동화책 만들 생각을 했나요.
“유학원 일할 때 외국으로 출장을 자주 나갔어요. 공항에서 돌아다니면 잡지가 엄청 많잖아요. 별의별 걸 다 세분화해서 소개하죠. 그걸 보면서 ‘우리(한국)는 자랑할 게 뭐가 있지’ 하다가 색동을 떠올렸죠. 닭을 천으로 만들다가 ‘닭이 사랑에 빠지면 꼬리가 색동이 될 거야’라고 상상하면서 색동 꼬리 닭을 만들었어요. 그러고 나니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광목에 색동 닭을 바느질하고 다른 물건들을 수놓으니 동화책이 됐죠.”
―색동초가에서 마크로비오틱(macrobiotic) 음식도 선보이기 시작했죠.
“방송에서 마크로비오틱 소개하는 프로를 보고 한옥호텔 투숙했던 무속인 손님에게 저염·유기농 식사를 냈던 기억이 났어요. 저도 원래 예민해서 가을이면 목에 개미 100마리가 들러붙은 것처럼 간지러워요. 건조하면 갈라져서 거즈에 바셀린을 발라 목에 붙이고 다닐 정도였고요. 기름이 조금만 변해도 머리가 띵해서 튀긴 과자를 못 먹어요. 엄마가 보리를 볶아서 주곤 했죠. 방송을 보면서 ‘그래, 나도 무염·저염식 먹었었는데 왜 몰랐지?’ 하면서 다시 제 식사를 찾았어요.”
마크로비오틱은 뿌리·잎·껍질을 통째로 먹는 일물전체(一物全体)와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원칙을 중심으로 유기농·채식을 권하는 식생활법. 1927년 일본에서 시작해 국제적으로 퍼졌다. ‘하루 딱 10접시만 팔겠다’는 공고를 사진과 함께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니 10분 만에 예약이 찼다. 이걸 본 농업회사법인 네니아가 2015년 ‘꽃, 밥에 피다’를 준비하면서 찾아왔다. 유씨는 “'유바카식 음식을 마음대로 펼쳐보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히트를 친 게 ‘보자기 비빔밥’이죠.
“식재료를 단순히 찌거나 굽기만 하고, 양념이라 해 봐야 소금·된장·간장·들기름 정도니까 손님들한테 미안한 거예요. ‘보기 좋게라도 하자’ 싶었어요. 밥(음식) 디자인에 신경 쓰기 시작했죠. 보자기 비빔밥은 ‘나와 밥 한 끼 같이 먹어주는 게 감사하고 소중한데, 이걸 어떻게 표현하지’ 하다가 보자기 같이 싸서 선물하자 했지요.”
보자기 비빔밥은 선풍적인 인기였다. 일본에서 일부러 먹으러 오는 팬도 생겼다. 메뉴를 개발하고 식당이 안정될 때까지 봐주다가 색동초가로 돌아온 유씨에게 큰 슬픔이 찾아왔다. “2017년 둘째 아들이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하늘나라로 갔어요. 부여에서 도시·지역 재생 프로젝트를 하는 분들이 같이 참여해달라고 제안했어요. 문밖에만 나가도 젊은이만 보면 아들 생각나 서울에 있기 싫었어요.”
그를 보러 부여에 놀러 온 친구에게 등 떠밀려 얼떨결에 오래 방치된 집을 지난 5월에 샀다. 100L짜리로 쓰레기만 30봉투를 버리고, 잡초 뽑고, 지붕을 고치고, 본채 외벽을 페인트로 노랗게 칠했다. 헛간 자리에 원테이블(one table) 음식점을 열었다. 점심·저녁 딱 한 팀만 받는다. 텃밭에 직접 심고 가꾼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낸다.
“서울에서 음식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식재료가 다 잘려서 와요. 음식 디자인은 재료 자체에 있어요. 잎, 뿌리 등을 떼어내면 디자인이 나와요. 그게 아쉬워서 텃밭을 만들었어요. 필요한 식재료를 키우고 가장 적당한 때 뽑아서 음식으로 만들어요. 우리는 자라는 과정에 관심이 없고 결과물만 취해서 먹잖아요. 저는 그게 싫어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부분을 끄집어내서 사람들과 음식으로 나누고 싶어요. 너무 흔해서 관심 없거나 천대했던 것들을 다시 귀하게 음식으로 대접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아 이런 게 있었구나, 이런 맛이구나 깨닫게 해주고 싶어요.”
지난 20일부터는 수리한 별채에 민박도 받고 있다.
―민박집 콘셉트가 ‘어린 왕자’입니다.
“어린 왕자 맨 마지막 장을 보면 ‘누가 이 어린 왕자를 만나거든 나한테 편지해다오. 내가 불안하지 않게, 안심할 수 있도록’이라고 끝나요. 어린 왕자가 우리 곁에 와서 수많은 이야기를 해준다는 상상을 했는데, 잠깐 앉아 있는 거는 욕심이 안 차는 거예요. ‘어린 왕자를 하룻밤 재웠으면 좋겠다. 내가 해주는 따뜻한 음식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사람들은 집 나오면 갈 데가 없어요. 스산한 마음을 가지고 나왔을 때 걱정 없이 잘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봐야겠다 싶었죠.”
유바카하우스는 어린 왕자 책으로 가득하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미국·일본·아이슬란드·인도 등 세계 50여 국가 어린 왕자 판본을 모았다. “어른들도 동심이 있어요. 하지만 발휘할 기회도 없고 발휘하려 하지도 않아요. ‘여기 들어오면 당신은 어른이 아니야. 체면 내려놓고 마음껏 그냥 시간 보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