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김예진(22)씨는 요즘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다. 그는 지난해 9월 파나소닉 워크맨을 중고로 구입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미국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이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2000년에 태어난 김씨는 이전에는 카세트 플레이어와 테이프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는 “지금까지는 음악 앱을 통해 디지털 음원을 구입했는데, 카세트테이프는 좋아하는 노래를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소유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며 “CD보다는 좀 더 복고적인 디자인이라 좋고, LP보다는 장비와 음반이 저렴한 게 카세트테이프의 장점”이라고 했다.
콤팩트디스크(CD)에 치이고, 디지털 파일(MP3)에 밀려 사라졌던 ‘카세트테이프’가 돌아왔다. 카세트테이프 애호가들이 모인 네이버 카페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은 최근 가입자가 1만6000명을 넘어섰다. 지난 12일부터 KT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판매하고 있는데, 핫트랙스 등 일부 판매처에서는 이미 물량이 매진된 상태다.
국내뿐 아니다. 영국 음반 산업 협회(BPI)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에서는 15만6542개의 카세트테이프가 판매됐다.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약 2배(94.7%) 증가한 수치이자, 2003년 이후 최대치다. 미국에서는 이미 2017년 카세트테이프 판매량이 전년 대비 136% 증가하면서 카세트테이프 복귀의 신호탄을 알렸다. 레이디 가가, 두아 리파 등 해외 가수는 물론이고 국내 걸그룹 블랙핑크, BTS도 지난해 카세트테이프로 앨범을 발매했다.
◇상견니 보고 따라 샀다
최근 카페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사람들’에는 대만 드라마 ‘상견니’를 보고 카세트테이프에 입문했다는 글이 많다. ‘상견니’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과거로 돌아간다는 설정의 타임슬립 드라마. 2019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대만 방송사 CTV와 SCC에서 방영됐는데, 지난 8년간 방송된 TV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넷플릭스, 왓챠 등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돼, ‘상친놈(상견니에 미친 사람)’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카세트테이프는 1980~1990년대 초반 음악을 듣는 매체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테이프 늘어짐이나 씹힘, 한번 재생하면 다음 곡으로 넘기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2000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다시 끌어낸 게 대중매체 콘텐츠다.
실제 2017년 미국에서 카세트테이프 판매가 급증한 배경에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있다. 우주에 사는 주인공 스타로드는 지구에서 가져온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즐겨 듣는다. 스타로드의 뿌리와 지구에서의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소품이 바로 카세트 플레이어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보면 과거의 불편함이 떠오르는 중·장년층과 달리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는 이를 하나의 재미로 느낀다. KT가 판매한 카세트 플레이어의 주요 구매층도 대부분 MZ세대다.
KT 디바이스 사업본부장 김병균 상무는 “과거에는 휴대성이 떨어지는 데다 한번 재생하면 다음 곡으로 넘기기 어렵다는 점이 카세트 플레이어의 단점으로 여겨졌다면, 디지털에 익숙한 MZ세대는 오히려 이를 아날로그가 주는 색다른 재미로 여긴다”고 했다.
◇코로나 비대면이 아날로그 불러
코로나 시대가 낳은 ‘비대면’ 문화가 카세트 열풍을 불러들였다는 분석도 있다. 이언 테일러 버밍엄시티대학교 음악산업학과 교수는 “코로나 기간에 대부분의 활동이 디지털로 대체됐고, 이로 인한 소외감이 심화했다”며 “코로나가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실제로 느낄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욕망이 카세트테이프를 부활시켰다”고 영국 매체 더컨버세이션에 기고했다.
카세트테이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쉽게도 지난 10일 카세트테이프를 처음 개발한 ‘루 오텐스’가 세상을 떠났다. 네덜란드 필립스의 엔지니어였던 그는 1963년 베를린 라디오 전자전시회에서 이를 처음 세상에 공개했다. 다큐멘터리 ‘카세트’를 만든 잭 테일러 감독은 미국 음악잡지 롤링스톤스에 “그는 카세트테이프의 부활을 의아하게 생각했다”며 “더 좋은 기술이 개발됐는데도 왜 초창기 기술로 만들어져 잡음과 음질 왜곡에 취약한 카세트테이프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고 했다. 카세트테이프의 아버지는 떠났지만, 카세트테이프는 남았다.